오스틴 파러 – 성찬례

October 4th, 2007

오스틴 파러 신부(Fr. Austin Farrer)는 한동안 성서정과의 복음서 본문에 기초하지 않고, 주제에 따른 아주 짧은 강론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신자들은 앉지 않고 서서 들었다. 그의 한 강론은 성찬례에 대한 그의 이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성사[성찬례]는 우리 종교[신앙]의 특별한 하나의 부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사적으로 행동화된 우리 종교[신앙] 자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것입니다. 특별히 그분은 우리 사이를 묶어주는 최고의 연대입니다. 소통하고 있는 여러분 모두는 이 때문에 그분의 이웃과 묶이게 됩니다. 같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 안에 살아계시고, 다른 사람 안에도 똑같이 살아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돌보듯이, 여러분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돌보십시오. 또한 여러분 안에서 그 보살핌을 행하는 분 또한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함께 소통할 때 우리 모두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서로 보살핍니다. 바로 이 연대가 또한 그리스도의 사람들 대부분을 이루며 낙원에 있는 성인들과 우리를 묶어 주며, 아직 낙원에 아직 들지 않았을지 모를 세상을 떠난 우리의 친구들을 우리와 묶어줍니다. 우리는 이들을 또한 보살피며,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1952년 성삼위일체 21주일)

in The Truth-Seeking Heart, p.125.

진리를 찾는 가슴을 위하여

October 4th, 2007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성공회 인물”로 칭한 오스틴 파러 (Austin Farrer, 1904-1968) 신부의 글 모음(The Truth-Seeking Heart)과, 아예 장서로 비치해 다시 꼼꼼히 읽어보려는 프랑스 전례학자 루이-마리 쇼베(Louis-Marie Chauvet) 신부의 책(Symbol and Sacrament)이다.

공부를 핑계삼다가 마음살이가 저으기 궁핍해졌다. 아마 그래서 요즘 일이 손에 잘 안잡히는 모양이다. 생활 방식과 더불어 독서 방식과 분야들에도 좀 여유와 균형을 줘야겠다 싶은 참에, 사제로서 신학과 신앙과 사목적 삶의 일치를 그 학문과 생활로 보여주었노라고 기억되는, 그러나 대체로 잊혀진 오스틴 파러 신부를 읽어보면서 이 마음의 핍진함을 다스려 볼 수 있을까 한다.

독서 분야를 학문적 독서(전례학, 성공회 신학, 인접 학문)과 영적인 독서(성서, 기도서, 영적 독서집), 그리고 기타(문학, 좋은 칼럼, 블로그)로 대충 구분했었다. 그런데 파러 신부의 책 편집자는 그의 삶의 성격을 원칙적인 세 단어로 정리해 두었다.

  • 엄정하고 지성적인 정직성 (honesty)
  •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깊은 겸손 (humility)
  • 진리와 복음에 대한 강한 확신 (confidence)
  • 이 덕목들은 이 글모음을 성공회 전통의 신앙적 세 기준인 성서, 전통, 이성으로 주제 분류된 책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 신앙적 확신 – 성서(복음)
  • 전인적인 겸손 – 전통
  • 지적 정직성 – 이성
  • 이런 점들을 다시 원칙으로 삼아 독서 분야를 정리하고 이를 또 하루 생활에도 이어야 할테다. “진리를 찾는 가슴”(the truth-seeking heart)을 위하여.

    “아니오”라고 말하기

    September 26th, 2007

    부탁이나 일거리에 항상 “예”라고 말하도록 강요받는 시대이거나, 스스로 강요하는 일이 적어도 성직자들에겐 빈번하다. 교인들의 요구나, 친구들의 부탁, 가족 일, 이런 일 저런 일 등에 항상 “그래”하고 받아들여야 미덕인 양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일의 효과도 없을 뿐더러, 일에 치여 결국 탈진하고 마는게 다반사. 일도 안되고, 자신도 지치고, 급기야 욕까지 먹게 된다. 이거 신앙적인게 아니다.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이렇게 말한다.

    “No, 아니오”라고 말하도록 배우는 건 우리가 “yes, 그래” 하며 조심스럽게 받아들여 키워왔던 것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방법이다. 하찮은 신들(gods)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건, 하느님께 “yes, 그래요”라고 말하는 한 방법이다. 한 이웃에게, 적어도 다음 차례까지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그래요”라고 말하는 한 방법이다. “그래요”라고 말하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래요”라고 말하는 것이 늘 만족스러운 것이 될 때, 이 둘은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거룩한 말들이 될 것이다.

    via The Christian Cent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