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 신앙인의 자리

Saturday, January 25th, 2014

성직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세상의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백성이 ‘보편적 사제직’(혹은 만인 사제직)을 나누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자리는 어디인가?

오래전, 시인 황지우는 이렇게 적었다.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짐에 관여한다. 그리고 문학은 반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상처에 관여한다. 문학은 징후이지 진단이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징후의 의사소통이다.”

여기 ‘문학’이라는 자리에, ‘신학’을, ‘교회’를, ‘성직자’를, 그리고 ‘신앙인’을 넣어도 되겠다. 나는 여전히 이 지점에서, 그동안 명멸했고 여전히 진행 중인 그리스도교 운동, 신앙 운동, 특히 소위 ‘진보적’ 종교 운동이 자기 자리를 굳건히 잡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관여’의 방식에서 ‘조짐’과 ‘상처’와 ‘의사소통’에서 실패했다고 본다. 변화를 향한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겠다 싶다.

오늘 외신을 통해, 그 ‘관여’의 상징적 이미지, 아이콘, 십자가, 아니 신앙의 자리를 발견한다. 시위대와 진압부대 ‘사이’에 우뚝 선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수사 신부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십자가와 아이콘, 바로 그 자체이다.

ap-photo-sergei-grits.jpg

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와 진압경찰 사이에 선 정교회 수사 신부들

종교는 ‘사이’와 ‘틈’의 공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대결하고 가르는 분열의 경계선 위에서, 그 경계의 공간을 넓히는 이들이 신앙인이다.

함부로 도통하여 ‘경계를 넘는다’고 말하지 말 일이다. 그 가느다란 경계의 선 위에서, 그 사이에서, 그 틈에서 수없이 떨리고 긴장하며 고통당하며, 조짐을 보고, 상처을 껴안으며,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서는 경계를 넘을 수 없다. 아니다. 실은, 경계를 넘는 일은 없다. 그저 그 경계의 공간을 넓히는 일만 가능하다. 예수께서 늘 경계를 걸으셨던 것처럼.

본회퍼 –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

Friday, March 30th, 2012

세계 성공회의 몇몇 관구는 디트리히 본회퍼 순교일을 축일로 지킨다. 영국 성공회 웨스트민스터 애비 성당에 새로 세워진 순교자 입상에 그도 포함되어 있다. 다행히 한국 성공회도 2004년 기도서 이후로 그를 기념한다. 그는 독일 루터교의 신학자요 목사로, 나치에 항거하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순교했다.

본회퍼와 성공회의 관계도 이채롭다. 영국 성공회 조오지 벨 주교는 본회퍼의 평생 후원자요, 반 나치 레시스탕스 운동의 동맹자였다. 1935년 3월 본회퍼는 영국을 방문하는데, 특별히 성공회 수도회인 부활 공동체를 찾아 머물렀고, 그 경험은 그가 이후 독일에 세운 비밀 신학교(Finkenwalde)의 한 모델 이 되었다. 그는 루터교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수도원 공동체’를 지향했고, 그 실험 속에서 <<공동생활>>을 썼다.

본회퍼는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갔고, 미국에 머물며 연구와 교수직을 계속할 수 있는 조건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그는 나치 아래 고통받는 독일 교회와 국민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붙잡혔고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감옥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모음집이 바로 <<본회퍼의 옥중서간>>이다.

1945년 4월 8일 예배를 마친 본회퍼를 형리 둘이 불렀다. “수인 본회퍼는 나오시오.” 본회퍼는 감옥 동료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이것이 마지막. 그러나 내겐 삶의 시작.” 다음날 4월 9일, 그의 교수형이 집행됐다. 그의 나이 서른 아홉.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께서 사순 첫 주일에 전하신 설교를 옮긴다. 로완 대주교는 본회퍼의 삶을 사순절 여정의 첫출발로 삼았다. 이제 사순절 막바지, 그리고 성주간을 거쳐 부활을 앞두고 있다. 올해 부활일은 4월 8일이니, 그가 감옥에서 불려나와 죽음을 준비한 날짜이고, 부활 후 첫날인 4월 9일이 그의 축일이다. 사순절과 성주간, 부활이 그의 삶에 온전히 포개진다.

사적으로도 느끼는 바 많다. 80년대라는 시대의 감옥에서 그를 읽었고, 진짜 감옥 바깥의 벽 안에서 벗과 그를 나눠 읽었다. 그리고 이제 그를 생각하면서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 나를 하느님께 열어놓고 돌아가야 할 참이기도 하다.

bonhoeffer_mit_studenten01.jpeg
(디트리히 본회퍼 – 신학생들과 함께)

본회퍼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사순 첫 주일, 2012년 2월 26일
캔터베리 킹스 스쿨 / BBC Radio 4 Sunday Worship

1939년 독일의 젊은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뉴욕에 있었습니다. 뉴욕 시의 독일 이민자를 돌보는 목회자로서 남아 있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미국 여러 곳에서 강연해달라는 요청을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독일 정권이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틀러에 대한 신랄한 비판 방송을 내보냈고, 나치가 교회를 통제하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들을 위해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비밀 지하 신학교를 운영했던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고심 끝에 본회퍼는 독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1939년 7월이었습니다. 뉴욕에서 겨우 한 달을 지내고 그는 떠났습니다. 극도로 위험한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6년 후 그는 죽었습니다. 반역 행위로 수용소에서 처형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근대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보물 가운데 하나를 남겼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쓴 편지였습니다. 그는 자유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 선택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접고 떠났습니다. 자신을 위험한 세계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했습니다. 이중간첩처럼 살면서 그는 매일 체포와 고문, 죽음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자유는 그가 가장 자주 글 쓰던 주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44년 7월에 쓴 유명한 시에서, 그는 진정한 자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생각을 적었습니다. 그것은 수련과 행동, 고통과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자유와 연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성찰 속에서, 그는 영원히 자유롭게 되는 길의 핵심에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가 관심한 자유는,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이 해야만 하는 대로 행동하는 자유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여러분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도 던질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열망과 선호 역시 여러분을 다양한 방향으로 이끌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열정과 감정을 헤아리고, 그것들을 세심하게 시험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행동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 행동에는 늘 위험이 뒤따릅니다. 어찌 보면 덜 자유롭게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일어나는 일은 여러분이 자신의 자유를 하느님께 내어 바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 달렸습니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를 하느님께 맡길 때, 자유는 ‘영광 속에서 완전해진다.’ 그리고 그 자유의 절정은 죽음의 순간에 찾을 수 있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할 때, 모든 것에 숨겨진 어떤 것,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 아래 자리 잡고 있던 하느님의 영원한 자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거칠고도 타협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에서 그렸던 것처럼, 본회퍼는 자신의 여정 끝에서 기쁨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기쁨은 하느님의 현실에 자신을 맞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만 옵니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 자기 생각으로 자신을 즐겁게 그려내는 그림, 자신을 용인하려고만 하려는 모든 노력은 이 하느님의 현실에 닿지 못합니다. ‘진리가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회퍼는 감옥에서 이 말씀을 깊이 간직했습니다. 이야말로 예수께서 진복선언에서 전하신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정의에 굶주린 사람은 복되다. 평화를 일구는 사람은 복되다.” 이들은 영원토록 중요한 것, 즉 하느님의 현실과 맞닿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유인입니다. 우리를 염려와 야망에 묶어두는 크고 작은 모든 종류의 거짓 이야기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여, 이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일이 여기엔 없습니다. 다만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하려는 집착에서 충분히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친절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자유에 깃들어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늘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며, 하느님의 삶인 현실과 진실 속에서 그들에게 기쁨을 주는 자유입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본회퍼는 자신이 운영하던 비밀 신학교의 학생들을 위해 작은 지침서를 썼습니다. 날마다 성서를 두고 침묵하며 명상하는 일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섬김의 직분을 위해서 우리의 시간을 요구합니다. 하느님도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기 전에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구원을 위해 내 마음에 오시는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을 열어 이 명상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명상을 통하여 우리가 앉았던 과거의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로 일어나길 원합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 마음의 표면이 잠잠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적이 감싸는 물처럼 말이죠. 그때라야 우리는 마음 위에 하느님을 참되게 비출 수 있습니다. 본회퍼의 삶과 죽음이 분명하게 보여준 것처럼, 이것은 세상에 대한 거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 속에서 행동하는 방법이요, 효과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입니다. 이로써 하느님 당신의 행동에 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 행동하시지만, 우리만을 통해서 그리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어수선함을 조용히 둘러보세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에서 진리를 덮어버리는 것들을 조용히 둘러보세요. 그것들은 정의와 사랑을 찾으려는 노력을 뭉개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시간을 갖는 것은 사치가 아닙니다. 이야말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어느 순간도 우리 자신의 욕망에 이끌리지 않도록 스스로 삼가면서, 참되고 진실하도록, 성서가 말하는 대로 ‘진리 안에서’ 머물도록 하는 일에 자유로워야 합니다. 결국, 어떤 어떤 자유가 가치 있을까요? 이 자유는 우리가 생각하고 집착하는 모든 것들을 대가로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을 향한 그리스도의 여정이 분명히 보여준 것처럼, 그 이야기의 끝은 완성이요, 고향으로 돌아옴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깊이 추구해야 할 자유입니다.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goo.gl/qrNFe
후원: 최은희-유상신 신부님

십자가 – 생명의 기쁨을 향한 산고

Friday, April 29th, 2011

부활 성삼일 전례와 영성을 다뤄 나눈 글이 있었다. 몇몇이 고민 어린 조언과 물음을 전했다. 특히 ‘성 금요일’ 부분에서 십자가 사건의 ‘구속’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지 않으냐는 신중한 아쉬움을 던지기도 했다. cf. 성 금요일: 정지된 시간

의도한 바였다. ‘지배 담론’으로 각인된 생각의 틀을 피해서, 그 사건과 의미를 오늘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다만, 내 공부의 깊이가 얕으니 너무 무모한 일이었나 싶기는 하다. 해명처럼 트위터에 적은 짧은 말을 좀 더 풀어보고, ‘지배 담론’의 영향, 그리고 다른 전통의 이해를 간단히 옮겨 보겠다. (발뺌: 고민을 드러내고 같이 생각해 보자는 초대일 뿐, 짜임새 있는 주장은 아니다.)

1. “십자가=구속/대속”의 공식 (트위터)

“십자가=희생=구속”(Cross=Sacrifice=Atonement)은 오래된, 그래서 대중적인 신학적 공식이다. 그런데 이 공식은 성삼일 전체의 사건을 십자가의 ‘의미’에만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십자가는 우선 무참한 폭력과 죽임의 사건이다. 이 사건에 정지하여 그 내막과 현실에 대면하지 않고 쉽게 구속을 위한 희생이라는 ‘의미’로 치환하면, 그야말로 ‘값싼 은혜’가 펼쳐진다.

십자가 사건을 현실 그대로 직시하는 동안에, 정작 그 ‘의미’를 찾는 해석학적 렌즈는 ‘죽음을 이긴 부활의 생명’이라는 사건 속에서 구성된다. 그제야 ‘구속’이 본뜻을 얻는다. 성삼일 전체 사건 속에서 십자가 사건을 봐야 하는 이유이다.

오래되고 널리 퍼져 깊이 새겨진 이해를 돌이키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더욱 빨리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틀’ 안에 머물러 조금씩 바꾸려는 시도는 그 틀이 품고 있는 개인주의적 ‘구속’의 영성으로 되돌아갈 때가 허다하다. 같은 틀 안에서 그 틀을 넘어서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2.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적과의 동침?

통째로 이어진 하나의 사건을 토막 내 보면, 생각도 토막 나기 마련이다. 토막 난 생각에서 펼쳐진 교리는 그 분절의 골을 깊게 하고 상상력과 행동의 방향도 다르게 한다.

몇 년 전,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수구’ 천주교인인 멜 깁슨이 만든 이 영화는 그 참혹한 리얼리즘이 또렷했지만, 그 리얼리즘은 ‘서방 교회’ 역사에서 구성된 특정 신학과 신앙을 포장하기 위한, 혹은 그에 집중토록 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저렇게 참혹한 고통을 당하신 구속자 예수’를 보며 격렬하게 몸을 떠는 두려움과, ‘그가 없었다면 살점 뜯기는 폭력과 심판이 내게 있었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교차한다. 서방 교회의 혈육인 ‘보수적’ 천주교인들과 ‘복음주의적’ 개신교인들이 모두 이 영화를 집단 관람하고 감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 이유일까? 전례에서 보자면, 서방 교회는 오랫동안 성삼일(Triduum Sacrum)을 하나로 이어보지 못했거나, 어떤 연유에서든 ‘십자가=희생=구속’의 신학이 지배했다. 천주교에서도 최근에야 성삼일 전례가 회복됐다. 개신교 역시 이를 회복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대체로 금요일 예배와 부활 주일 예배만 드린다. 성삼일 전례를 회복한 성공회도 그 지배 담론에 저항할 생각이나 의지를 별로 보이지 않는다.

3. 교부들의 다양한 생각 – 구속과 회복 사이

구속 혹은 대속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근거 없다는 말이 아니다. 최근에는 다른 해석이 나오기도 하지만, 구약의 희생제사가 대체로 이 유형이었고, 유대교 전통에 뿌리를 둔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서 아주 자유롭지 못했다. 교회는 오랫동안 그 연결점과 근거를 사도 바울로의 로마서 3장 25-26절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 구절의 앞뒤 맥락, 즉 창조 때 인간이 가졌던 영광스러운 본성의 회복, 그리고 하느님이 주도하시어 인간을 의롭다고 여기겠다는 구원 의지의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한다.

초기 교부들이 이에 관하여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모상으로 한 인간 본성의 회복을 십자가의 ‘들어 올림’ 사건에 비추어 보았다(cf. 이레네우스, 아타나시우스). 서방 신학을 대표하는 구속/대속 신학은 교회의 대분열이라는 격동기를 살던 캔터베리의 성 안셀름(1033-1109)에 이르러서야 더욱 굳어지고 퍼졌다. 이 지점에서 하느님은 자기 아들을 죽여서라도 채무 관계를 논리적으로 청산하는 냉혈한으로 채색된 것은 아닐까?

4. 다른 이야기, 다른 전통

그렇다면 이 지배적인 서방 교회 신학의 곁과 뒤에서는 어떤 생각이 흐르고 있었을까? 여기에는 다만, 중세 여성 신비가가 바라보는 십자가 환영과, 정교회 전통의 생각을 들어 옮겨 놓는다.

십자가: 산고를 겪는 ‘어머니-예수’

중세 여성 신비가 Marguerite d’Oingt(ca. 1240-1310)가 십자가에 보내는 시선은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한 성찰과 일치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성이다.

그대는 내 어머니가 아닌가요? 아니, 어머니보다 더 크신 분… 오 사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 주님, 일찍이 이런 아이를 낳은 산고의 어머니를 보셨으니, 이제 출산의 시간이 주님께 찾아와, 십자가라는 고통의 자리에 누우셨으니, 주님은 거기서 움직일 수도, 돌아누울 수도, 사지를 펼 수도 없었습니다. 그처럼 거대한 고통이라면 누구나 몸부림칠 텐데도… 주님의 혈관이 터져 나와 그 하루에 세계를 낳으셨습니다.
(Pagina meditationum)

예수께서는 고별사에서 당신의 고뇌를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 “여자가 해산할 즈음에는 걱정이 태산 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게 된다”(요한 16:21).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울부짖음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는 시편 22편에서 따온 말이다. 이 시편이 ‘산파이신 하느님’을 노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의 이 외침은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희생과 성찬례 – 알렉산더 슈메만

[희생에 관한] 서방 교회의 신학적 관점은 그에 대한 두려움, 혹은 너무 쉬운 낙관론을 담고 있다. 이점이 우리 동방 정교회 전통의 영성 분위기와는 다르다. 이런 [대속적 희생 같은] 용어들로 동방 교회의 경험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미사에 깃든 희생, 즉 ‘부서진 몸과 흘린 피’에 대한 전통 전체를 보자. 동방 정교회에서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창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포도주는 그것이 피같이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성찬례의 선물이다. 포도주는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례 초입에서 하느님께 봉헌을 들어 올릴 때, 우리는 십자가와 그 고난에 아직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다만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상황으로 기쁘게 회복된 것이다. 빵과 포도주는 내 몸과 내 피가 된다. 이것이 근본적이다. 그 행복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희생의 삶과 생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포기할 뿐만 아니라, 위로 올라간다. 그 올라가는 가능성에는 끝이 없다.
(Sacrifice and Worsh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