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 슬픔이 빚은 측은지심의 성찬례

Sunday, August 3rd, 2014

창세 32:23~32 / 시편 17:1~7, 15 / 로마 9:1~5 / 마태 14:13~21
2014년 8월 3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일 오후 6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인생살이에는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행복감이 넘쳐나기도 하지만, 고통과 상처, 그리고 슬픔이 지배하는 일이 더 잦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인 이들도 아주 멋진 모습으로,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혹은 아주 늠름한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우리가 덮어 바른 화장을 조금만 지우면, 우리가 치장한 옷가지를 조금만 벗어 들추면, 민얼굴과 맨몸에 드러날 상처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고통과 상처, 그리고 슬픔이 우리 인생을 지배합니다. 고통이 견디기 어려워서, 슬픔을 더는 참기 어려워서, 아니 과거에 난 상처와 그 흉터가 너무 보기 싫어서, 그 모든 것을 잊고, 지우고,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여전히 종교와 영성을 추구하는 많은 이가 바로 이런 마음을 담고 예배당과 성당, 사찰을 찾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점집을 들락거리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바로 이런 고통과 상처, 슬픔의 흉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천사와 씨름한 야곱 이야기는 성서를 자주 읽어보신 분이라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쌍둥이 형 에사오의 장자권, 즉 상속권의 축복을 가로채어 달아난 쌍둥이 동생이 아니었던가요? 야곱은 이제 이룰 것을 다 이루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엄청난 죄책감이 있습니다. 죄책감을 넘어서 두려움이 있습니다. 형 에사오를 향한 죄책감과 두려움입니다. 형과 어떻게 화해할지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선물을 보내면 형 마음이 풀어질까 하여 많은 재물을 먼저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지, 혹은 고민하다 지쳐서 잠시 깜빡 잠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야곱은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해야 합니다. 얼마나 절박했는지 천사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천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천사가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부러뜨렸는데도 그는 천사를 놓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고 떼를 씁니다. 결국, 천사는 못 이기는 체하며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복을 빌어줍니다.

우리는 종종 이 성서 이야기에서 복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야곱을 생각하곤 합니다. 하느님께 떼를 쓰면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뤄진다고 기대합니다. 하느님께 끈질기게 부탁하면, ‘내’ 안에 있는 고통과 아픔, 슬픔과 흉터도 없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나요? 여러분은 기도해서 얼마나 삶이 더 나아지셨나요? 들어주지도 않는 기도, 이제는 불판을 갈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말이죠. 불판을 갈기 전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이 성서 이야기를 거꾸로 읽으면 사태가 달라집니다. 야곱은 하느님을 대면하고 하느님과 씨름하여 축복을 얻어냈지만, 그는 결국 장애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엉덩이뼈에 큰 상처를 입고 평생을 절름거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가 드러내는 냉정한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믿어서 얻은 보상도 있지만, 여전히 인생은 상처투성이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야곱은 그 상처와 더불어서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 상처를 통해서야 하느님을 대면했습니다. 신앙은 상처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상처와 더불어 견디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상처를 통해서 하느님을 되새기고 하느님을 대면하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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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Reilly 1928~, The Feeding the Five Thousand, 1958년 작)

오늘 복음서 이야기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을 넘게 먹이셨다는 유명한 식사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모르는 분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는 독특한 자리에 있습니다.

복음서를 다시 읽어볼까요? 오늘 복음서 본문 바로 앞 문단입니다.

“[헤로데 왕은]…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 있는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그 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묻고 예수께 가서 알렸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거기를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오늘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이 참으로 사랑하던 사람 세례자 요한이 참수를 당했다는 소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뱃속에서부터 서로 알아보고 뛰놀았던 사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요한은 그 앞에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붙잡혀 감옥에 갇히자, 그의 선교를 이어받아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세상에서 가장 큰 예언자, 가장 큰 사람으로 칭송했습니다.

그 깊은 벗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권력자들의 연회장에서 낄낄거리는 오락과 내기의 대상이 되어 그 목숨이 속절없이, 그리고 처절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분노와 고통, 슬픔과 아픔을 되새기며 세례자 요한을 충분히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며 조용히 쉬고 싶었습니다. 요한의 삶을 되새기며 이어질 당신 자신의 슬픔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은 그저 부랑아처럼 떼 지어 다니며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슬픔에 잠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에서 이제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들을 보시며 측은하게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들의 처지를 마음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과 애도 속에서 그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어디서 나올까요? 그것은 깊은 종교적 영성의 수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윤리적 도덕적 훈련에서 오지도 않습니다. 사회의 불평등을 기밀하게 분석한 자료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측은지심은 자신의 슬픔에서 옵니다. 종종 자신의 슬픔은 피해의식과 분노가 되기에 십상입니다. 강박관념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슬픔으로 자기 자신만을 바라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슬픔을 통해서, 자신이 겪는 고통을 통해서, 자기 몸 깊숙이 패인 상처와 흉터를 통해서, 밖을 바라보고 밖에 있는 사물과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슬픔의 시선은 우리에게 측은지심을 마련합니다. 슬픔은 측은지심이 됩니다. 자신의 깊은 슬픔을 자기 안에 쌓지 않고 밖을 향해 열 때, 우리의 눈물이 볼록렌즈가 되어서 세상의 다른 아픔과 상처와 슬픔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생기는 새로운 마음이 바로 측은지심입니다. 여기서 얻는 새로운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측은지심은 마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조각뿐인데, 이걸로 어쩌란 말입니까?” 하며 따져 묻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그 작은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시고,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 결과, 남녀 어린이 모두 합하여 일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풍성하게 먹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풍성하다는 말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이제 제자들의 몫이 됩니다. 그 광주리를 저마다 둘러매고 세상을 향해서 먹이는 일, 다른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일에 나서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성찬례입니다. 성찬례를 성 목요일에 있었던 주님의 만찬으로만 보면 단견이고 큰 오해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든 식사 기적의 종합인 탓입니다. 가나의 기쁜 혼인잔치, 배고픈 이를 먹이신 이야기,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이들과 나눈 식사, 그리고 잡히시기 전날 저녁에 나누신 마지막 식사를 종합합니다.

더욱이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절망하며 낙향하던 제자들과 나누던 부활의 식사입니다. 낙향하여 어부로 돌아가서 허탕을 치던 제자들에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고서는 당신이 손수 마련하신 모닥불에 생선을 구워주시던 부활의 식사입니다.

이 모두 낙심과 실패, 상처와 슬픔, 그리고 과거의 흉터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슬픔이 마련한 측은지심으로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순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슬픔과 상처를 통해서 새로운 현실,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다른 슬픔을 보라고 합니다. 그들과 함께하고 먹이고 보살피며 곁에 있으라 합니다. 연대하라고 합니다.

신앙은 고통과 상처와 슬픔은 없애는 길이 아니라 함께 견디며 걷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상처와 슬픔이 빚은 성찬례에 초대합니다. 여러분을 이 측은지심과 연대의 성찬례에 초대합니다. 아멘.

성령 강림 – 샬롬과 살림의 질서

Sunday, June 8th, 2014

성령 강림 – 샬롬과 살림의 질서

주낙현 신부

성서는 하느님의 일이 내림과 올림의 형태로 반복되는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역사에 관여하시려고 인간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성육신 사건입니다.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셨다가 새로운 부활의 몸으로 다시 오르셨습니다. 부활 사건입니다. 그 부활의 연속선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끝에 오르셔서 참 인간이 얼마나 거룩하고 높은 존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승천 사건입니다.

이제 새로운 내림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오십일 째 되는 날에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성령강림 사건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역사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구원을 살아가는 신앙인 공동체인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그 삶이 인간의 역사 곳곳에 확대되는 삶을 보여줍니다.

http://ecva.org/exhibition/WaP/080-KathyBozzuti-Jones-WAP.htm

사도행전이 전하는 보도에 따르면, 성령이 내려오시자 출신과 성격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어떤 걸림돌도 없이 소통이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출신과 지식과 언어에 대한 차별이 그쳤습니다. ‘선택된 민족’이라는 ‘선민’ 의식을 내다 버리고, 하느님의 구원이 ‘만민’에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남녀노소 어떤 차별 없이 각자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건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이를 서로 존중합니다. 말 못 하며 살아야 하던 ‘종’들도 ‘예언자’의 위치를 얻습니다. 세상의 질서가 바뀝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건네신 ‘샬롬’(평화)의 질서, ‘살림’의 문화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 속에 깃든 새로운 ‘샬롬’의 기운입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살림’의 숨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서로, 그리고 이웃과 나누는 호흡입니다.

성공회, 천주교, 개신교 같은 서방 교회는 성령이 불처럼 내린 것을 상상하며 ‘홍색’을 전례 색깔로 삼았습니다. 한편, 정교회 같은 동방 교회에서는 성령이 주시는 생명에 초점을 맞추어 ‘녹색’을 성령강림일의 전례 색깔로 삼았던 점이 흥미롭습니다. 연중 기간에 생명의 ‘녹색’을 사용하는 것은 이 관습을 되새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활밤에 새 불을 축복하며 열린 시간은 이제 하늘에 불처럼 내려오는 성령과 더불어 새로운 시간의 삶을 채웁니다. 그러니 성령강림일 이후의 삶은 성령으로 옛 질서를 불태우고, 성령 안에서 샬롬과 살림을 누리면서 그늘 진 곳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탄생 이콘

Tuesday, December 24th, 2013

정교회 전통에서 이콘(ikon)은 그림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신비를 비추는 창(窓)이다. 신비를 비추기에, 인간의 신학적 사고를 전달하는 다른 도구인 언어의 신학과 더불어 이콘의 신학이 있다. 그래서 이콘은 그림이 아니라 신학이기에, “그린다”고 하지 않고, “쓴다”고 한다.

고마운 분들과 독자들에게 성탄의 은총과 복락을 바라는 인사를 드리며 나눈 이콘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담은 신학이다. 이참에 이 이콘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이 이콘이 쓴 성탄의 신학을 읽는다.

Nativity_Icon.jpg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을 이런 모양으로 드러낸 이콘은 14세기 비잔틴 정교회 관습 이후에 정형화되었을 것이다. 성서 이야기에서 나왔을 장면을 더하고 빼면서 좀 더 복잡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배치도 조금씩 다르다. 오늘 제시한 이콘도 이후에 발전된 전형 가운데 하나다.

  1. 무엇보다도 장면이 낯설다. 우리가 대체로 서방 교회의 ‘성화’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서방 교회의 탄생 ‘성화’는 대체로 아기 예수에 집중하지만, 동방 교회의 이콘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사이에 오시는 사건의 신비를 드러내는 데 집중하는 듯하다.  
  2. 이 이콘의 중심인물을 잡기가 난처하다. 아기 예수보다는 마리아에게 중심을 이룬 느낌이다. 당연하게도 아기보다 크고, 다른 인물보다 크며, 아기 예수와 함께 화면의 중심부를 차지한다. 마리아가 누운 붉은색이 강렬하다. 이 붉은색은 해산의 피, 그리고 생명을 상징한다. 참 생명이신 하느님을 낳은 분(Theotokos: 하느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돋보인다. 탄생 사건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다.  
  3. 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어두운 동굴이다. 이 동굴은 예수를 환대하는 않는 세상을 상징한다. 예수가 연약한 아기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 왕으로 등장하기를 기대했던 세상의 욕망을 보기 좋게 뒤집는다. 그리고 그 두텁고 완고한 인간 동굴의 벽을 꿰뚫는 빛 세 가닥이 아기 예수께 닿는다. 삼위일체의 빛이다. 그 안에 별이 있다. 별이 있다. 세상 많은 사람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다.
  4. 이 사건을 축하하고 예견한 많은 이가 있다. 동굴을 꿰뚫고 가르는 빛 양편에는 천사들이 등장하여 노래한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5. 왼쪽 화면 중간에는 동방박사의 행렬이 보인다. 이 역시 예수의 탄생이 모든 세계에 알려졌다는 뜻이요, 하느님의 구원 사건이 전 우주적으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6. 오른쪽 화면 중간에는 한 천사가 목자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린다. 그 옆으로 이새의 나무가 보인다.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7. 오른쪽 화면 아래에서는 요셉의 고뇌가 흥미롭게 눈에 잡힌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마리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두려워하고 고뇌한다. 그 옆에서 목자로 변장한 마귀가 요셉의 고뇌를 부추긴다. 마리아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아기를 버리라고 유혹한다. 이 장면은 ‘테오토코스’ 교리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8. 이와 쌍으로 왼쪽 화면 밑에는 산파가 등장한다. 예수는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 산파가 필요했고, 태에서 뭍은 피를 씻어야 했다. 메시아는 참 인간이다는 교리적 선언이다.
  9. 다시 아기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를 가까이서 맞이하는 소와 나귀가 이채롭다. 이사야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준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 오늘날의 세계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10. 아기는 흰옷을 입고 구유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수의를 입고 관에 뉘인 모습이다. 아기 예수의 미래를 암시하는 장면이다.
  11. 마리아의 시선은 아기를 향하지 않고, 우리를 향한다. 이콘마다 조금씩 다양하긴 하지만 걱정스러운 눈을 거두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당신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텐가?”하고 묻는 시선이다. 아니면, 이 부서질 듯이 연약한 아기와 자신을 저버리지 말라는 애처로운 눈망울이다.

이 그리스도 탄생의 신학을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시겠는가? 마리아의 걱정스럽게 애처로운 시선에 어떻게 여러분의 눈을 맞추시겠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 시선을 돌리고 누구를 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