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Sunday, November 13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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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주교는 신앙의 교사, 공동체의 사목자, 복음의 진리에 삶을 바치는 순교자이다(본지 2016년 10월 30일 치). 주교의 사명은 이 본질적인 직무를 품고 교회와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하느님의 백성인 신자들과 동행하는 일이다. 주교의 권위는 자신을 교회에 묶어서 이 사명에 충실할 때만 나온다. 이런 권위만 제대로 작동한다. 그래서 새로운 주교의 식별과 선출 과정은 이러한 선교 지향과 내실을 검증하는 과정이다.

흔히, 기도로 준비하여 주교를 뽑자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기도는 주문이나 주술이 아니다. 기도는 신앙인이 맡겨진 일을 면밀하고 책임 있게 하겠다는 다짐이다. 자신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선출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드리는 간구이다. 주교 선출에서 선교 비전과 내실을 모두 함께 성실하게 검증하지 않으면 기도는 반쪽이 되고 만다. 그래서 세계성공회 여러 관구에는 주교 후보자의 자질과 내실을 충분히 검토하는 과정이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이끄신다.

잉글랜드 성공회는 먼저 교구 내에 주교선출위원회를 설치한다. 현재 교회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다음, 교구의 미래 선교 방향을 정리한다. 새로운 주교는 현재의 관점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뽑는다. 이 선교 방향을 다시 관구 주교선출위원회가 치밀하게 검토하고 그에 적합한 주교 후보를 추천한 뒤에 지명한다.

미국성공회는 한국처럼 교구의회에서 선출한다. 주교선출위원회가 마련한 교구의 미래 선교지향을 완전히 공개하고 이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지원자를 가려낸다. 서류 심사와 면접을 거친 후에, 신자들과 함께하는 공청회 과정을 갖고, 마지막에 교구의회 양원의 투표로 뽑는다. 대체로 2년이 넘는 과정이다.

현행 대한성공회 주교 선출 방식에는 교회 현실에 필요한 선교 지향과 내면의 힘을 확인하는 절차가 몹시 빈약하다. 이를 보완하려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교구의 선교지향과 후보자 내실 검증을 현행 주교 선출 투표 과정의 적정한 순간에 적용해야 한다. 그 식별의 잣대는 성공회의 전통을 깊이 이해하고, 시대정신에 대한 뚜렷한 희망 안에서, 현실 세계에 능동적이며 미래지향적으로 대응하는 선교 전략이다.

시대정신은 지도자 선출에 매우 중요하다. 당면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10년 20년을 내다보며 시대와 현실의 변화를 제대로 읽고 대응하면서, 교회로 사람을 불러모을 때 우리 교회는 살아남아 복음을 전할 수 있다. 현재 성공회의 미래는 기존 신자의 안정적인 50대 이하의 성공회 신자와 아직 성공회에 들어오지 않은 ‘잠재적 신자’(타교파, 타종교, 무종교)에게 있다. 이들을 향한 복음의 선포와 신앙의 변증이 필요하다. 이 시대정신이 식별의 기준이다.

주교 개인이 지닌 영성의 일관성도 중요한 식별 잣대이다. 바른 영성은 인격과 신학이 깊이 있는 성찰로 만날 때 나온다. 주교는 지위와 권위를 가진 직분이기에 권력의 유혹에 흔들리기 쉽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함에 관한 자기 성찰이 투철하고, 주교직의 본래 사명을 늘 되새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주교는 사적인 관계나 온정주의에 휘둘리지 않는다. 정직한 근거와 합리적인 대화로 관행과 관습에 과감하게 손을 대는 사람이다. 이런 합리적인 일관성이 부족하면, 결국에 성직자와 신자의 신앙도 흩어지고, 교회도 위태로워진다. 교회 역사의 증언이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여러모로 어수선하다. 기대했던 현실은 간데없이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지도자와 지도자에 대한 신앙인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반증하는 현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복음으로 세상을 세우라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교회 먼저 복음과 역사에 바로 서는 일이 절박하다. 이 새로운 시작을 복음의 신앙, 시대정신의 선교에 헌신하는 새로운 주교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

  1. [성공회신문] 2016년 11월 13일 치 – 서울교구 주교 선거를 앞두고 [성공회 신문]의 요청으로 짧은 글을 썼다. 지난 호 “주교는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주교의 근본적인 직무를 되새기고, 이번 호에서는 “주교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주교 선출을 위한 식별의 기준을 제공한다. []

믿음 – 겨자씨 한 알의 인내와 생명

Sunday, October 2n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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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겨자씨 한 알의 인내와 생명 (루가 17:5~10)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무너졌으며,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하바 1:4). 하바꾹 예언자의 탄식이 오늘도 세계 곳곳 멀고 가까운 여러 지역과 세대를 불문하고 계속 터져 나옵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지키며 하느님께서 약속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뿌린 땀과 눈물과 피가 세월 속에 흥건한데도, 세상은 좀체 바뀔 줄 모르는 것 같아 야속합니다.

고통과 슬픔에 지쳐 절망하는 목소리도 커갑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이들이 헛된 짓을 한다는 비아냥도 들리는 듯합니다. 눈에 띄지 않고 적당히 살자는 처세술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이때 신앙이 흔들립니다. 예언자의 절규에 하느님께서 단호한 목소리로 응답하십니다. “끝날은 기어이 온다, 멋대로 설치지 마라, 의로움은 신실함에 있다”(하바 2:4).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을 판단 기준으로 삼지 말며, 하느님의 가치에 충실할 때 우리는 정의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에 대한 신뢰와 투신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사도들은 눈에 띄는 효과와 성과를 당장 달라고 요구합니다. 믿음을 크기로 재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믿음의 핵심은 작은 바람에 흩날리도록 미약하고, 마음 먹고 부릅뜨지 않으면 금세 지나칠 수도 있는 ‘겨자씨 한 알’에 있습니다. 미약한 채로도 견뎌내는 힘입니다. 그 안에 숨 쉬는 생명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우리 삶의 최고 판단 기준으로 삼고, 세상의 작은 것들이라도 쉽게 무시하지 말고, 새롭게 발견하고 눈길을 주며 보살피라는 당부입니다.

하느님의 약속과 예수님의 당부는 믿음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잘해드려서 그만큼 되돌려 받으려는 거래가 아닙니다. 작은 인간은 크신 하느님께 그 무엇으로도 잘해 드릴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고뇌와 고통을 없애려는 진통제도 아닙니다. 그 호소가 믿음이라면 세상의 고통은 이미 없어졌어야 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지켜보시며 함께하신다는 신뢰 속에서 싹 틉니다. 동료 신앙인과 더불어 이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가치를 지켜나간다는 확신으로 협력할 때 자라납니다.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서로 지탱해 주며 풍파에 꺾인 상처를 위로하고 격려는 헌신으로 튼튼해집니다. 이 줄기에 수많은 신앙인의 땀과 눈물과 피가 스며들어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고, 많은 이를 먹이며 생명을 키웁니다. 이 일이 믿음의 교회가 할 일이며, 신앙의 종이 따라야 할 의무입니다.

신앙인은 이러한 믿음의 행동에 부름받은 종입니다. 하느님의 종인 우리는 군말 없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입니다.

“하느님, 부족한 종들에게 믿음을 깊이 심으시어,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하느님 나라 살기 훈련

Sunday, August 28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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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살기 훈련 (루가 14:1, 7~14)

어느 축하 식사 자리에서 목격한 일입니다. 갈증 난 손님들에게 수박을 대접하는 어떤 이가 행색이 조금 허름한 분에게 수박 곁자리 조각만 모아서 가져다주었습니다. 실수였는지 모르겠으나 잠시나마 당황하는 분의 안색이 역력했습니다. 이를 발견한 다른 분이 얼른 치우고 수박살이 튼실한 조각들을 담아 대접했습니다.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머리에 오래 남았습니다. 혹시라도 교회 잔치에서 일어난다면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앙인은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서 몸으로 먼저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신앙인은 사람이 모두 하느님의 자녀요, 서로 형제자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생각’과 다른 ‘하느님 나라 신앙’의 출발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식사에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접보다는 예수님이 식사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봅니다. 배고픈 손님의 처지보다는 안식일 율법 규정을 따르는지 검열하려는 태도가 엿보입니다. 하느님께 예배하려는 마음으로 더 온화하고 너그러워지기보다는, 예배 순서와 몸짓의 잘잘못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과 닮았습니다. 이런 태도에서는 휴식과 회복이라는 안식일의 본뜻을 잊기 쉽습니다. 초대하여 넉넉히 나누고 축하하는 기쁨이라는 의미가 사라집니다. 세상에서 얻은 관습과 고정관념이 자신을 지배하면 신앙의 세계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기만 합니다.

잔칫상에서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잔치에 ‘아무것도 갚지 못할, 힘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분부하십니다. 세상의 현실 감각과 동떨어진 말씀입니다. 세상의 질서는 경쟁하여 더 높은 지위에 올라, 더 편안하게 살라고 강권합니다. 지위 높고 부유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일에 힘쓰라는 처세술도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얻은 세상의 지위가 언제 내리막길을 걸을지 모른다고 경고합니다. 이익을 고려하여 끼리끼리 어울리는 삶은 언제 초대명단에서 빠질지 몰라 전전긍긍합니다. 세상의 질서를 따르면 그 기준에 따라 판단 받기 때문에 늘 불안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요즘 자주 목격하는 장면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질서에 들지 않으려 애씁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떼어놓고 구별합니다. 여기서 ‘구별된 삶’이라는 신앙의 말이 나왔습니다. 제 삶을 떼어놓고 구별하여야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해주십니다. 이처럼 축성된 삶의 다른 이름은 온전한 삶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사람과 사회를 찢거나 가름 없이 하느님처럼 넉넉하게 품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보상해 주지 못한다 해도, 하느님께서 기억해주신다는 확신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에서 구별되어 온전하고 넉넉하게 사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에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삶에 꽃피어 오릅니다.

세상의 질서는 ‘사다리’를 오르려 서로 경쟁하고 물리치고 차별하는 삶입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삶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서로 환대하여 손 맞잡고 이루는 ‘원’의 삶입니다. 담장 높은 감옥이 아니라, 둥근 울타리 안에 사람을 초대하여 귀 기울이고 보호하며, 그 울타리의 지경을 넓혀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훈련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삶을 가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례 때의 다짐을 기억합니다.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