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이끌려 – 유혹과 신앙

Sunday, February 1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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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이끌려 – 유혹과 신앙 (루가 4:1~13)1

그리스도교 신앙은 너무 솔직해서 불편하고 낯선 종교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는 귀에 감기는 멋진 말로 적당한 위로와 얄팍한 행복을 보장하곤 합니다. 반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생에서 축복과 고난을 분리할 수 없다고 투박하고도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 내리신 성령은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선언하지만, 같은 성령이 곧바로 춥고 외로운 광야로 주님을 이끕니다. 이 축복과 고난의 갑작스러운 교차가 당황스럽습니다. 악의 유혹은 이 순간을 파고들지만, 바른 신앙은 이 현실을 정직하게 대면합니다.

“성령에 이끌려” 떠나는 사순절 여정은 삶 곳곳에 똬리 튼 악마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내면 여행입니다. 오늘 예수님 이야기에는 악마를 식별하는 잣대가 선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욕구에 목말라 합니다. 이때 악마는 귓속말로 “당신은 이런 사람이잖아” 하고 꼬드깁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면 “내가 이런 능력이 있거든, 내가 이런 지위가 있거든, 내가 이런 체험이 있거든” 하며 모든 상황의 중심에 ‘자기’를 내세웁니다. 자기 안에 악마가 움직인다는 징표입니다.

사순절 여정은 자기 안에 있는 악마를 감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활개 치는 악마의 실체를 대면하여 물리치는 외면 여행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력을 자기만족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문화, 여러 사람을 보살피라고 마련해준 자리에 올라앉아 제멋대로 힘을 부리는 행태, 자신의 종교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며 짓누르려는 태도가 악마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인생의 근거를 자기에게 두지 않고, 자기 바깥에 있는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둡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기쁨과 이웃의 안녕을 가치로 삼는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누리며, 사회를 변화하는 힘을 세웁니다.

유혹과 신앙의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떠나갑니다”(13절). 갈등과 고뇌를 완전히 끝내주겠다고 약속하는 종교는 달콤한 악마의 유혹일 뿐입니다. 성령의 축복이 광야의 고난으로 이어지듯이, 축복받은 신앙의 여정은 고뇌의 연속입니다. 다양한 갈등은 더 나은 공동체를 세우려는 애틋하고 아름다운 몸부림이고, 깊어지는 고뇌는 자신과 사회의 심연을 성찰하고 분석하며 대화하는 지성입니다. 이는 신앙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정직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징표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손에 이끌려 아픈 세상의 현장에 도사린 악마를 물리치며 걷는 사순절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2월 14일 사순 1주일 주보 []

더 깊은 곳으로 – 신앙의 사도직

Sunday, February 7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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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곳으로 – 신앙의 사도직 (루가 5:1~11)1

“깊은 데로 가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평생 어부로 살았던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어 새로운 임무를 주십니다. 이 부르심은 우리 신앙생활의 의미와 방향을 보여줍니다. 더 깊은 곳으로 가서 다시 도전하고 두려움 없이 사람을 만날 때, 신앙과 선교의 사도직이 펼쳐집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잡은 고기가 없었습니다. 누구나 노력하고 대가와 보상을 바라지만, 세상일이 늘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땀과 눈물이 모자란 탓이 아닙니다. 어찌할 수 없는 외부 요인이 더 많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은 절망감과 배신감의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그 감정이 커서 다른 이의 조언에 귀를 막고 마음을 닫기도 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실패의 감정이 이끄는 자기 폐쇄의 유혹을 넘어서라는 초대입니다. 이 초대에 응답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때 새로운 사건이 펼쳐집니다.

“깊은 데로 가라.” 예수님의 초대는 명백한 해결책이나 분명한 위로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위험으로 이끄는 것처럼 들립니다. 더 깊은 데로, 더 멀리, 더 위험한 도전을 할 때, 자기 안위와 폐쇄의 그늘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바닥은 아직 꿈틀거리는 자기 본위의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고, 그 죽음을 경험하는 밑바닥입니다. 자기 중심성은 가볍고 표면적인 삶의 태도를 만듭니다. 그래서 작은 바람에도 출렁거리기 쉽습니다.

깊은 곳은 위험할지언정, 흔들리지 않는 깊이와 새로운 삶의 차원을 발견하도록 합니다. 절망이든 행복이든 그 깊은 곳에 닻을 내릴 때 우리 삶은 어떤 어려움에도 의연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 깊은 곳에서 삶의 가장 큰 절망과 슬픔의 끝에 다다른 많은 사람을 선물로 발견합니다. 이 만남 속에서 우리는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과 손잡아 연대하여 바닥을 치고 떠오를 힘을 얻습니다.

신앙의 깊은 모험은 종교에 흔하게 퍼진 격려의 덕담이나 수사가 아름다운 잠언을 넘어섭니다. 우리 신앙의 배움을 더 깊은 곳으로 끌어가 함께 대화하며 심화합니다. 신앙인은 어떤 선생의 가르침에 그저 감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신앙의 모험과 체험과 배움으로 두려움 없이 다른 낯선 이들을 이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두려움 없는 신앙인의 사도직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실로 “사람을 낚는 사도”가 됩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2월 7일 연중 5주일 주보 []

성 가족 – 아픔과 희망을 섞은 거룩한 잔

Saturday, December 26th, 2015

성 가족 – 아픔과 희망을 섞은 거룩한 잔 (루가 2:41~52)1

가족! 입에 올려 듣고 생각만 하여도 만감이 교차합니다. 온갖 애틋한 추억과 행복이 넘실대는가 하면, 한 꺼풀만 들춰도 아픈 기억과 슬픈 상처가 고스란합니다. 사랑의 온기가 포근하면서도, 차가운 긴장과 갈등이 서린 가정입니다. 교회는 성탄 첫 주일을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이 이룬 ‘성 가정 축일’로 지키곤 합니다. 그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탄생을 충분히 기뻐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최초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 축일과 아무 죄 없이 살해된 어린이들을 기억하는 축일을 지킵니다. 도대체 이 얄궂은 교회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유년기의 예수님과 부모님을 만납니다. 열두 살은 당시로는 사춘기를 넘어 성인이 되는 전환기입니다. 부모는 신앙의 전통을 자식 세대에게 애정으로 가르치고 물려주려 해마다 성전에 데려갑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는 아들을 제대로 못 챙기고 하루가 지나서야 허둥대며 찾습니다. 겨우 찾은 어머니의 염려는 아들을 나무라고, 아들의 대답은 퉁명스럽기만 합니다. 이 장면은 어쩌면 가족이 꼭 거룩하여 온전하지만은 않고, 오히려 갈등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성서는 ‘성 가족’조차도 미화하지 않고 그 내막을 그대로 들춰냅니다.

신앙과 인생을 가르치려는 어른의 노력은 종종 종교의 타성에 젖기도 합니다. 성전이 상징하는 종교와 신앙에 자기 식대로 왔다 갔다 할 뿐 심각하게 살려 하지는 않습니다. 정작 젊은이가 성전을 알게 되어 그 안에 머물며 신앙의 대화와 배움에 열심이면 당돌하고 무례하게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다릅니다. 어린 나이에도 성전에서 기도와 대화에 힘을 쏟습니다. 종교와 신앙이 삶에 자명한 대답을 준다면 대화나 논쟁은 필요 없겠지요. 그러나 예배에 참석하고 어떤 교리를 잘 안다고 인생의 답이 분명해지지는 않습니다. 성서의 말씀과 해석, 성찬례의 신비를 경험하는 감각 속에서 새롭게 도전받고 풀리지 않은 의문을 붙잡고 대화할 때, 신앙이 발돋움합니다. 신앙의 의문과 대화가 계속되지 않으면 신앙은 멈추고 맙니다. 그렇다고 신앙은 늘 앞으로 치고 나가는 일만도 아닙니다. 어린 예수님은 다시 어른의 지혜와 경험 앞에 순종합니다. 불완전한 가족과 함께 더 배우고 나누고 아파하기 위해서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남녀노소 모두 아픔의 현실에 눈감지 않고 더 껴안을 때, 우리의 지식과 마음이 자랍니다. 모든 세대가 갈등을 무릅쓰고 서로 겸손하게 배울 때, 가족이든 사회든 새로운 화해의 길이 열립니다.

이 새로운 가족의 길은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머지않아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늘 따라다녀 지켜보는 마음에 애가 타지만, 그 길을 억지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늙은 마리아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으로 젊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지켜볼 것입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찢어진 가슴의 아픔이 우리 가족과 교회, 사회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갈등하고 상처 입은 가족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탄생의 기쁨과 더불어 상실과 실패, 절망의 상처가 우리 사회 깊은 곳에서 숨죽여 울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 울음 속에서 세상의 여러 슬픔을 만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아기 예수님 안에 품으신 꿈과 아픔의 눈물을 섞어 함께 잔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의 새롭고 거룩한 가족이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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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2월 27일 성탄 1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