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사랑과 사사로운 사랑

Monday, May 14th, 2012

히포의 성 어거스틴은 이분법적 세계관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깊숙이 남겨 놓았다. 그 이분법의 폐해를 의심하더라도, 수사학자요 신학자요 주교로서, 선과 악의 문제로 씨름했던 어거스틴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 현실의 문제이다. 성 어거스틴은 두 도성에 관한 이론을 나름 완비하기 전에, 이미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라는 책에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놓았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룩하고 다른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높은 도성에 속한 탓에 공동선을 생각하고, 다른 하나는 그 오만하여 공동선마저도 자기 개인의 것으로 만든다. 하나는 하느님께 순종하지만,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평온하지만, 다른 하나는 소란스럽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다른 하나는 반역한다. 하나는 진리에서 멀어진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만,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칭송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나는 벗이 되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다른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 한다. 하나는 이웃의 선을 위하여 권위를 행사하지만,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위를 휘두른다. 이 두 가지 사랑은 처음에 천사들에게서 드러났으며, 하나는 선한 이들에게 깃들고, 다른 하나는 악한 이들에게 깃든다. 결국, 이것이 두 도성을 구별하게 한다. 하나는 정의로운 이들의 도성이요, 다른 하나의 사악한 자들의 도성이다. 놀랍고도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로 이 두 도성이 인류 안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관장하시고 다스리신다. 이 두 도성은 세상 속에 섞여 있어 역사 속에서 계속될 것이지만, 마지막 심판이 그것을 가를 것이다. (De Genesi 11:15.20)

흥미롭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선한 도성과 악한 도성의 차이는 “사랑”의 차이에 기인한다. 탐욕마저도 사랑의 변종일 뿐이다. 게다가 이 사랑의 향방이 세상의 참된 권위, 혹은 권력의 향방을 가른다는 것이 성 어거스틴의 정치신학이다. 사랑의 방향이 하느님의 진리와 이웃의 공동선을 향할 때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권력욕이 될 때가 구분된다. 권위는 이웃의 선을 위한 다스림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지배욕으로 나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 연설에는 사랑의 마음이 절절하다. 그래서 ‘사랑’의 계명을 주시면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성 어거스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벗”의 관계를 깊이 되새겨 윗글에 적었으리라. 동등한 제자직, 벗 된 제자직이 복음인데도, 질시와 지배, 기어코 무릎을 꿇리려는 허세가 여전히 교회에 득세한다. 어떻게 견디고 이겨낼까?

시인 오든(W.H. Auden)은 일찍이 “반지의 제왕” 서평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결국, 선이 이긴다는 이야기는 그것이 힘에 의지하는 것일 때 오히려 모순적이다. 사랑과 자유인 선은, 선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을 힘으로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정의롭든 불의하든 힘 있는 편이 이긴다…

그러나 악은 선이 가지는 상상력에서 열세이다. 선은 그것이 악이 될 가능성을 상상하여 이를 거부하지만, 악은 그 자신 말고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이 악의 눈을 가린다…

악은 선이 절대 권력의 반지를 파괴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배와 공포에 대한 욕망 만이 사우론을 이끌었던 탓이다.

다시 이분법적 세계관의 폐해를 염려하면서도, 이렇게 말해야겠다. 이 선과 악의 싸움이 우리 사회 곳곳에도 극명하다고. 선한 일에 힘쓴다는 이들도 실은 무엇인가에 ‘눈이 가린’ 일이 많다고. 이때 선한 이들이 지탱할 끝까지 선한 상상력이 절박하다. 신앙인에게 그 상상력 훈련은 내용 갖춘 성찰이요 기도일테다. 그런데 절박한 만큼, 성찰과 기도가, 되다.

케네스 리치 “하느님 체험” – 새로운 영성 선언

Thursday, February 16th, 2012

‘성공회에는 조직신학이 없다’는 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용감하게 내뱉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 근거도 없이 얕은 생각으로 떠든 말을 주워듣고 되뇌다 퍼진 말일 테다. 조직신학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련한 여러 사안을 성서와 전통과 인간의 하느님 경험에 기대어,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풀어보려는 노력이다. 좀 더 보편적 소통의 틀과 훈련으로써 조직신학이라는 하나의 신학 방법이 존재한다. 이런 노력과 방법이 없는 교회와 신학이 있겠는가?

다만, 성공회는 특정한 교리적 주장이나, 몇몇 신학적 거장의 주장에만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경험의 지평을 넓고 다양하게 본 탓에, 좁은 의미에서 ‘특정 교리 체계에 갇힌 서술로서 조직신학 혹은 교의학’과는 거리를 둔다. 신앙적 사안들에 대한 오랜 논의에서 배우고 숙고하며 대화하되, 이를 역사의 전통과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다. 이것이 성공회가 조직신학을 하는 방법이다. 오히려 이런 고민 탓에 요즘은 조직신학이라는 말보다 ‘구성(constructive) 신학’이라는 말을 쓰자는 이들도 있다.

무책임한 말에 부화뇌동하여 신앙 전통에 흐르는 면면한 근거와 삶에는 애써 눈감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변명하려 하지 않는지 살필 일이다.

이 참에 몇 달 전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 떠올라 정리하고, 그 뒤에 동료와 나눈 번역 하나를 덧붙인다.

케네스 리치 신부의 <<하느님 체험>>(Epxeriencing God, 1985)이라는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우리말 제목 <<하나님 체험>> 청림출판, 2011). 이 책은 웬만한 조직신학과 영성신학 입문서보다 훨씬 낫다. 갖추어 신학사전으로 쓸 만큼 내용과 색인이 풍요롭고, 영적 독서집으로 쓸 만큼 엄선된 인용이 빼곡하다.

서방 교회 전통의 편향을 넘어서서, 교부 전통과 정교회 신학의 목소리를 회복하여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에서 전통이 풍요로움이 되살아난다. 당연히 교부들 및 정교회 전통의 사고방식, 즉 그 영성과 신학, 전례와 실천에 대한 입문서 역할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오랜 현장 사목 경험 탓에 그가 풀이하는 교회의 영성 전통은 늘 일상과 현장 바닥에 닿는다.

성공회-가톨릭(Anglo-Catholic) 전통, 특히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 전통에 깊이 자리 잡은 저자이기에, 성공회 신학과 전통에 대한 해방신학적 근거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성공회 독자라면, 8장 “육신 속의 하느님”, 9장 “성찬례의 하느님”에서 큰 도전과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케네스 리치 신부는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모든 참된 신학은 변화에 관한 것이다. 참된 하느님과 만남 안에서, 그 만남을 통해서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한 것이다”(서문).

친절하게도 리치 신부는 책 끝에 이 책 전체를 요약하는 후기를 마련하여, 이 책에 담긴 새로운 영성 회복의 방향을 선언한다. 이 훌륭한 ‘매니페스토’를 아래에 옮긴다.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과 별개다.)

후기: 쇄신된 영성을 향한 선언

1. 쇄신된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느님의 비전을 현대 세계에 회복하는 일에 관심한다. 이 영성은 현재의 상황에 의미있는 방법들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영의 깊은 차원에 대해서 말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겸손하고 신중하게 마르크스주의와 심층 심리학, 풍요로운 자각을 향한 사회적 탐구에서 얻은 통찰을 고려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2. 이 영성은 유대 백성의 삶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에 근거한다. 구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광야에서 순례하는 백성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서 말하며,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그 거룩함과 정의를 추구한다.

3. 이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두며,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시는 하느님의 충만함을 본다. 이 영성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느님과, 동지인 인간, 즉 드러난 신성과 들어 올려진 인성을 함께 본다.

4. 이 영성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도적 교회의 신앙을 바라본다. 그것은 인류에게 일치를 주시는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화해를 이루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요, 빛과 사랑의 하느님,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하느님, 그리스도의 몸을 양육하고 세우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다.

5. 이 영성은 사막의 영성이다. 사막의 경험을 통하여 교회의 관상적 삶을 그리워하며 이를 굳건히 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성 생활에 똑같이 중요한 홀로됨과 함께함을 같이 추구한다.

6. 이 영성은 구름과 어둠의 영성이다. 하느님의 마음에 있는 신비와,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 속에 있는 신비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손쉬운 답변만 내놓는 종교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신앙의 어둔 밤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관상적인 영성이다.

7. 이 영성은 물과 불의 영성이다. 즉 씻어내는 영성, 정화하는 영성, 쇄신하는 영성, 영적인 따스함의 영성이다. 세례의 물과, 성령의 불이라는 상징 속에서, 이 영성은 지속적인 거듭남과 삼키는 불이신 하느님에게서 매일같이 도전받으라는 부르심을 본다. 이는 카리스마적인 영성이다.

8. 이 영성은 육신이 된 말씀에 근거한 영성이다. 이 영성은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붙잡고, 하느님 자녀의 살과 피 속에 있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섬기려고 노력한다. 하느님의 선물인 물질과 인간의 성을 즐거워하고, 인간적인 것 안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관문을 본다. 이는 유물론적 영성이다.

9. 이 영성은 성찬례의 영성이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인 성찬례 거행이 있다. 이 영성은 성찬례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본질을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이 영성은 세상 속에서 나눔과 평등의 성찬례적 삶을 선언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이는 공동 생활의 영성이요, 거룩한 나눔의 영성이다.

10. 이 영성은 고통의 영성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서 복음의 핵심을 찾기 때문이다. 이 영성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선포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 한다.

11. 이 영성은 신비주의 저자들에게 배우면서 하느님이 모든 실재와 우리 존재의 근거임을 본다. 이 영성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그리스도교 신학의 필수 요소로 회복하고 증진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적 지도와 내적 생활을 심화하는 사목을 발견하여 증진하며, 신앙생활의 신비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함께 묶으려고 노력한다.

12. 이 영성은 여성의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 성서와 전통 속에서 하느님에게 여성의 이름을 붙였던 일, 그동안 잊혀지고 무시당했던 여성적 방식으로 하느님을 경험하고 묘사한 저자들의 통찰 등을 진지하게 다룬다. 이 영성은 현대 여성 운동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13. 이 영성은 정의와 평화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며, 인종 차별을 비롯한 여러 지배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세계평화와 핵무장 해제 군축을 도모하는 운동 속에서, 가난과 불평등을 없애는 캠페인 속에서 하느님을 알고자 하고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 좀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드려는 투쟁 속에서, 이 쇄신된 영성은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보며,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나눈다.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1985, 421f.

후원: 구균하 신부, 민김종훈 부제

마르크시즘, 학자들의 아편? – 테오 홉슨

Wednesday, May 18th, 2011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은 마르크스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거의 같은 시기, 같은 곳에서 그 종교인들도 역시 종교가 허약한 진통제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 수단임을 알았다. 적어도 성공회 전통 안에서 영국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를 시작했던 모리스 신부(F.D. Maurice)와 킹슬리 신부(Charles Kingsley) 등이 그러했다. 이들은 ‘그리스도 왕국’이라는 종말론적인 실체가 현실을 비추지 않으면 교회는 타락하고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가르침과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은 잘 알려진 적대적 관계만큼이나, 그 친연성이 늘 큰 관심 주제였다. 지성사적인 근원과 근친 관계는 제쳐 놓더라도, 이 둘이 맺은 역사적 관계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근대 서방 교회의 여러 개혁은 대체로 세를 넓히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정면 대응에서 시작되곤 했지만, 실천 속에서 그 관심과 결과는 두 운동이 비슷했다. 천주교의 소위 ‘노동헌장'(Rerum Novarum, 1891년)은 말 그대로 ‘새로운 사태’에 대한 교회의 변화와 대응의 촉구였다. 그 사태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의 처지에 대한 관심과 공산주의 운동의 확산에 대한 우려였던 것은 역설적이다. 한국 민중신학의 주창자 가운데 한 분인 안병무는 새로운 신학적 임무의 하나로 ‘반-공산주의’를 삼았다. 그러나 이후에 민중신학은 늘 ‘용공’ 신학으로 몰려 탄압받았다. 남미의 해방신학은 당시 맥락화한 마르크시즘을 가장 적극적으로 신학에 받아들인 최초의 신학 운동이요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 그리스도교가 마르크시즘에 관심했던 데 비해, 현실과 이념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그리스도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거나 적대적이었다. 그 주창자와 이후 큼직한 추종자들이 만든 ‘아편’ 규정의 무게에 짓눌렸는지 모른다. 이런 처지에 요즘 테리 이글턴이나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들이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의 친연성에 대한 새로운 독서를 제공하는 것은 격세지감이겠다. 학계의 마르크스 연구와 실천 현장에서 이를 두고 논란이 많고, 이른바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의 이론을 꽤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그 논의와 관심의 방향에서 본다면, ‘진보적’ 신학 담론의 방향은 이제 교회 전통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접근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른바 80년대 이후로 짓눌러온 ‘과학적 방법론’에 눌린 무의식의 열등감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테리 이글턴이 낸 최근작 <<마르크스는 옳았는가?>>의 발췌를 번역해서 올렸거니와, 이 책에 대해서 한 ‘리버럴’ 그리스도인이 쓴 서평을 소개하여 짝을 맞추려 한다. 서평자인 테오 홉슨은 이글턴의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우리말 번역 제목은 ‘신을 옹호하다’)에 대한 서평도 이미 쓴 바 있다. 이 글들과 아울러 몇 년 전 고종석이 쓴 글도 읽어보면 좋겠다. 아래에 그 목록과 링크, 그리고 새 서평을 아래에 남긴다.

그리고,

마르크시즘 – 학자들의 아편? – 자신의 신앙과 씨름하는 테리 이글턴

테오 홉슨

대체로, 주장을 담은 책은 꽤 직설적이다. 저자란 그 주장을 믿기 때문에 그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영국의 마르크시스트 문학 이론가인 테리 이글턴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전에 펴낸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에서 새로운 형태의 무신론을 비판하며 그리스도교를 변호했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다. 최근작, <<왜 마르크스는 옳았는가?>>에서 이제 그는 자신이 늘 지지했던 마르크시즘이라는 신조를 변호한다. 그러나 정말 그것을 믿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이 책은 마르크시즘에 대한 열 개의 관습적인 반대 목록에 따라 이뤄져 있다. 즉 마르크시즘은 더는 적절하지 않다, 폭력적이다, 경제에 과도하게 기대고 있다, 불가능한 완결주의다, 정체성의 정치를 무시한다 등등. 인상적인 활력과 G. K. 체스터튼 풍의 익살을 이용하며, 이글턴은 이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다.

전체로 보면, 그는 무비판적인 신봉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가 펼치는 주장이 좀 더 분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합리적인 마르크시스트인 것을 보여주려고 중요한 문제들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다룬 것은 옳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 하나가 있다. 마르크시즘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즉 공산주의는 좋은 결과를 내면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가? 아니면 할 수 없는가? 이 문제는 2장, 즉 마르크시스트 혁명은 늘 불행으로 끝난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장에서 직면하는 문제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우리는 20세기 공산주의는 여러 조건이 완전히 잘못돼서 실패했다는 말을 듣는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그는 이렇게도 경고했다, 일국 혁명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그리고 역사는 이런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줬다고 이글턴은 말한다. 좋다. 그렇다면 이글턴은 여전히 마르크시즘이 ‘적절한’ 조건들에서 작동할 수 있고, 어떤 형태의 혁명(그가 말하는 대로 유혈 혁명일 필요가 없는)이 자본주의를 끝장낼 수 있고, 확실히 나은 정치적인 질서를 출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자유 정치적 제도를 가볍게 무시해도 될까? 혁명이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판돈을 걸어도 될까? 이 문제에 대해서 이글턴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마르크스가 이런 문제에 모호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할 텐가. 그건 변명이 안 된다. 마르크스 이후로 우리는 이런 모호성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봤다. 내가 보기에 이글턴은 자신의 중심 임무를 슬쩍 피해 가려 한다. 그 혁명이 정말 일어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해야 하는 임무 말이다. 왜 그걸까? 그 자신이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혁명의 실제 가능성을 그가 확실하게 믿지 않는다는 판단이 옳다면, 왜 이글턴은 마르크시즘을 변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글턴이 마르크시즘을 하나의 비판적 도구로, 진정한 비판적 관점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적’이라는 말은 너무 약하고, 너무 차갑다. 마르크시즘은 열정 어린 비판적 입장을 제공한다. 마르크시즘 말고, 다른 이념들은 불평등이 만드는 불의에 대해 관대하다. 이 관습적인 생각은 근본주의적 자유 시장주의가 아니라, 시장을 통제해서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도록 길들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생각은 부(富)가 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긴박성과 열정이 부족하다. 기존 질서가 점차로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을 두고 죄책감과 낭패감 말고 다른 대안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관습적인 생각은 운명론이라는 강력한 진통제를 수반한다. 결국, 운 좋은 계급이 있어서 좋은 교육과 좋은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있고, 운이 좋지 않은 다수는 불안정과 실업, 하급 문화에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인종차별을 반대한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경제적 처지가 만들어내는 인종 분리를 받아들인다.

오직 마르크시즘만이 이 운명론을 거부할 수 있고, 완전하고 즉각적인 변화가 필요한 불의와 불평등을 볼 수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이글턴을 마르크시스트로 남게 하는 것이다. 온정주의적 운명론에 대한 이런 반대와 완전히 다른 질서에 대한 요구를 그는 높이 존중한다. 그는 세상을 이런 식으로 보는데 집착한다. 물론 여기서 신앙적인 도약이 따르기도 하는데(혁명은 가능하다!),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는 부정적(negative) 마르크시스트라고 불릴 수 있겠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시즘의 공격을 믿는다. 그러나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덜한 것 같다. (후자를 믿는다면, 그것을 전달하는데 아주 취약하다.) 그가 긍정적으로(positively) 믿고 있는 바는 급진적으로 다른 질서에 대한 생각을 부추기는 일이며, 기존 질서에 대해 반대하는 정념이다.

그러므로 이글턴이 손에 든 마르크시즘은 정확히 과학도 아니고, 실질적인 정치적 제안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정치적 삶에 대한, 끝내 보편화해야 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어떤 전망이요, 응시요, 담론이다.

이글턴도 잘 알다시피(그의 지적 뿌리는 해방신학이다), 여기에는 종교와 강한 친연성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물기는 경계한다. 어떤 점에서 그는 마르크시즘 안에 어떤 영성적인, 혹은 [초월적] ‘타-세계적’인 면이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직자들(parsons)이 생각하는, 그런 타-세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통기간이 지난 것이 분명한 어떤 것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자들이 미래에 건설하기를 희망하는 다른 세계이다.”

‘파슨스’(성직자들)라는 낡은 용어에는 어떤 기이함이 감춰져 있다. 이글턴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마르크시즘과 종교가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없음을 자신이 인정하고 있음을. 앞으로 쓸 책에서 이 점을 좀 더 공개적으로 다뤘으면 좋겠다.

원제: Theo Hobson, “Marxism, the Opium of the Professoriate?”
출처: http://goo.gl/k6DkT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