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꼬리 문 생각 – 기도서의 축일

Thursday, November 6th, 2008

오늘이 윌리암 템플 캔터베리 대주교의 축일인 탓에 학교에서도 그를 기념하는 미사를 드렸다. 그는 18세기 이후 교회력에 들어 있는 유일한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그가 별세한 10월 26일이 아닌 11월 6일이 왜 그의 축일인지는 알 수 없다. 영국 성공회 [공동 예배](2000)이 처음으로 이 날을 그의 축일로 지정했고, 미국 성공회가 이 날짜를 따랐다. 최소한 영국과 미국은 그가 교회의 윤리적 이상과 사회적 책임, 그리고 그의 실천이 현대 성공회 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한국 성공회 기도서(2004)는 성공회 전통 안에 있는 근대 혹은 현대의 위대한 영성가들이나 신앙 위인들을 교회력에 넣는 일에 인색하다. 10월 26일은 ‘채드’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인물, 그리고 11월 6일에는 ‘레오나드’라는 6세기 은수자의 축일로 한다.

현대의 성인 몇을 교단 전통을 막론하고 넣긴 했다. 마틴 루터 킹(4월 5일), 본회퍼(4월 9일)가 그렇다. 탁월한 일이다. 그런데 가만 보니 타의에 의한 죽음으로서 순교에 대한 남다른 존경이 비친다. 그러나 그 선택마저도 대중적인 인물, 혹은 교단적인 전통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독재에 저항하다 순교당한 우간다 성공회의 자나니 르움 대주교나, 천주교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엘살바도르)는 찾을 수 없다.

현행 기도서 직전에 나온 [교회 예식서](1997) 작업에서 교회력 부분을 따로 맡아 크리스토퍼 존 수사와 함께 제안서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근거나 상관성이 떨어지는 성인들이나 인물들을 대폭 삭제하고, 성공회 전통과 정신, 그리고 근-현대 그리스도교 역사에 하느님 선교의 증인이 된 인물들을 넣으려고 애썼다. 성공회 신앙 전통을 다양하게 대변하는 웨슬리 형제, 존 키블, 프레데릭 모리스 등이 그러했고, 물론 마틴 루터 킹, 본회퍼, 로메로 대주교 등도 포함시켰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성서의 여러 성인들을 위해서 구약 성서, 신약 성서의 성인들 축일을 넣어, 교회가 어떤 이름 없는 성인들의 삶을 다시 기억하도록 도우려 했었다. 신앙의 족적과 하느님의 선교의 증언은 굳이 순교를 해야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작업이 어디 구석에 남아 있을 터이나, 우리 기도서에서는 흔적이 아련하다.

미국 대선 – 불량국가 벗어나기

Monday, November 3rd, 2008

이런 저런 생각을 끄적여 놓고도 올리진 않았다. 별 말 적을 필요도 없이 이미 판가름난 대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 사이에선 대선에 대한 우려가 잦아들지 않는다. 오바마가 지면? 이렇게들 걱정하는 게 엄살이 아니라 진심인게 역력하다. 참 안쓰러운 나라다.

오바마가 이기겠지만, 이러고도 이기지 못한다면, 나는 그저 미국 역사와 문화에 암처럼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의 인종차별” 혹은 선연한 피부 색깔에 대한 혐오감의 승리라고 밖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작년 한국 대선처럼 어떤 탐욕에 눈멀어 우상을 세웠다고 평할 밖에 없으리라.

내일, 미국이 불량국가라는 오명을 벗어나는 최소한의 첫걸음을 새롭게 내딛길 바란다.

업데이트 (11월 4일):

적어도 미국은 지난 8년 간의 악몽을 벗어나는 길을 택했다. 물론 지난 몇 십년간의 불량 깡패 국가를 탈피하는 일은 더 오래 걸릴 것이지만, 작으나마 어떤 변화의 시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만도 고마운 일이다. 축하한다. 오바마! 더 많은 도전을 받기 바란다.

그리고 미국의 흑인들에게 깊이 축하한다. 60-70년대 시민 인권 운동에 참여했던 내 선생님들과 내 나이든 친구들에게도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아니 더 많은 미국인들에게 처음으로 내 축하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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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노벨상, 그리고 자본의 똘마니들

Monday, October 13th, 2008

폴 크루그먼, 노벨 경제학상 수상” 이른 아침에 인터넷 신문으로 듣는 소식이다. 노벨상에 관심 갈이 없지만, 폴 크루그먼이 올해의 수상자라는데 눈에 번쩍 뜨인 것은, 경제학을 알아서도, 노벨상을 우러러봐서도 아니다. 그저 눈에 익숙하고, 그 통찰력으로 세상살이 하나씩을 알게 해주는 한 칼럼니스트의 이름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노벨 경제학상에 애초에 관심이 없는 건 내 개인적인 무식때문이겠지만, 미국 경제, 금융 위기의 한가운데서, 가파르게 오른 물가와 범죄율을 살갗으로 느끼는 상황에 이 소식은 같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또 다른 사람을 떠오르게 했다. 1980년대인가 90년대인가 밀턴 프리드만이라는 노골적으로 발가벗은 자본주의 경제학자가 같은 이름의 상을 받았다. 이 프리드먼은 미국 레이건 정부와 영국 대처 정부의 강폭한 자본가들의 세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인물이었다. 그의 신자유주의 이론이 지배한 지난 25년 간의 결과물이 현재 미국 금융 위기이라는게 여러 사람들의 말이다. 그는 행복하게도 이 지경을 보지 않고 수를 다하고 재작년에 죽었다.

폴 크루그먼이 노벨상 선배인 프리드먼과 어떤 대척점에 있는지 상세히 판단한 능력이 내게는 없다. 최소한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이론을 신봉하는 부시 정권과 그와 쌍둥이인 맥케인-페일린 후보의 경제 정책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인 크루그먼을 보는 것으로 가늠할 정도다. 경제학에 문외한인 탓인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그의 정치 문화에 대한 분석이 빛난다. 영어를 충분히 즐길 만한 능력이 없는 탓이겠으나, 우리나라의 정운영에게는 못미쳐도(;-)), 그를 더이상 못읽는 처지에, 참아주고 읽을 만하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크루그먼은 오늘도 바쁘게 글을 올린다. 세계 경제까지 위기에 빠뜨린 워싱턴 부시 정권보다, 오히려 런던의 브라운 정권이 더 발빠르게, 그리고 좀더 정확하게 사태를 보고 대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애들의 눈을 가리는 것은 “사적인 것(민간소유)은 좋고, 공적인 것(공공소유)은 나쁘다”(private good, public bad)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그는 잊지 않는다.

이 이데올로기는 여느 자본주의의 기본 이념이겠으나, “하나님이 축복한 나라”에 우리나라를 통째로 봉헌하고 싶어하는 우리 정부의 똘만이들에게는 더 없는 경전이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이 이데올로기의 똘마니들에게는 그들 소수의 “집단적 개인”말고는 “함께 견디고 살아가야 할 우리”는 없다.

한편, 이 “우리”라는 점에서 폴 크루그먼이 그 비평의 지평을 넓혔으면 좋겠다(그를 잘 몰라하는 말이라면 다행이겠고). 미국이 제국으로서 세계 경제의 중핵인 것은 사실이나, 그 영향 아래서 살아가는 세계를 “우리”라는 큰 틀과 가치에서 보고 살폈으면 한다. 얼치기 세계주의자인 토마스 프리드먼 같은 이에게 세계 문제 분석을 내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내키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인’이라는 수식어를 그가 받은 노벨상에 붙여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때문이다. 같은 신문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 같은 세계에 대한 지평과 연민과 경험이 그에게서도 드러나기를 바란다. 그러니 상금으로 세계 여행도 많이 하시라.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