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그늘 – “재의 수요일” 번역 후기

March 1st, 2011

다시는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희망하지 않기에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이 사람의 재주와 저 사람의 기회를 탐내는 일
더이상 이런 것들을 얻으려 애쓰지 않기에
(늙은 독수리가 왜 날개를 펴야 한단 말인가?)
여느 통치의 권력이 희미해진다고
슬퍼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재의 수요일” I, 부분)

사순절이 다가올 때마다, T.S.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을 조금씩 번역하여 올려두었다. 이번에 번역을 마쳤다. 번역의 부족함이 분명하지만, 이 일을 하는 동안 그 말에 담긴 생각을 더 느리게 살피며 함께 걸을 수 있었다. 그 동행의 전후 사정과 그 느낌을 모두 적어 밝힐 수는 없다. 그의 시와 시어가 드러내는 대로 삶의 희망과 절망은 너무 얽혀 있다. 지난 몇 년간 내 여러 처지를 되새기고 삶을 관조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만 할 뿐.

재의 수요일 – T. S. 엘리엇
Ash Wednesday (1930) by T. S. Eliot (1888~1965)
I / II / III / IV / V /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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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표지 및 속지 – 스콧 피츠제럴드에 쓴 시인 친필)

그의 시와 함께 다시 깨닫는 사순절의 의미들: 자기 안에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 언제나 구원은 밖에서 ‘틈’과 ‘사이’로 선물로 오는 것이니, ‘도통’하려 들지 말 것, 하느님 앞에서 내 작음을 알되 큰 구원이 감싸는 은총을 거부하지 말 것. 값싼 희망과 절망에 휘둘리지 말 것.

엘리엇은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귀화하고, 종교마저도 성공회로 이적하여, 자신을 당시 성공회 내 강력한 전통으로 거듭나던 ‘성공회-가톨릭'(Anglo-Catholic)이라 불렀다. 그의 “재의 수요일”은 그런 신앙의 여정과 전통의 성격을 매우 잘 드러내는 탁월한 시로 읽힌다. 언젠가 자신을 “문학에서는 고전주의자, 정치에서는 왕당파, 종교에서는 성공회-가톨릭”이라고 한 것처럼, 가장 고전적인 의미의 보수주의자로서 자신의 덕을 이 시와 다른 글들에서 드러낸다. 인간의 부질없는 작음, 개인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이마저 회의와 물음의 대상으로 삼아 덧없는 낙관의 위험을 경계했다. 한편, 끊임없이 ‘초월’이라는 ‘밖’의 은총에 기댔지만, 이 초월은 이미 우리 삶에 여느 구석에서든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엘리엇의 몇몇 시와 글에서 발견하는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보수의 얼굴이다.

그는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이 시를 출간했다. 비슷한 나이에, 궤를 같이하는 신앙적 전통 안에서, 닮은 정치 신학적 견해를 겹쳐 보며, 스스로 흠칫 놀란다. 나는 전통에 기댄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물론 나는 그의 여러 ‘보수주의적’ 비관에 모두 동의하지 않고, 그의 ‘보수주의적’ 낙관주의에 다른 비관주의로 대답하겠지만.) 그동안 여러모로 나를 주저하게 하는 내 태생의 ‘보수성’과 씨름했다. 이를 받아들일 무렵, 이미 내게는 그와 정반대되는 딱지들이 셀 수 없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항변은 부질없는 일이다. 오염 없는 언어가 불가능한 마당에, 이 현실을 인정하고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약속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 말고는 소통은 불가능할 테다. 누구를 비판하거나 나무랄 힘도 이젠 없다. 다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며 만드는 그늘 속에서 벗을 만나 틈과 틈 사이로 대화하며 기도할 뿐. 구원은 깨진 틈 사이로 드는 빛이니.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
희망하지 않더라도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

얻음과 잃음 사이에서 흔들리느니
꿈이 교차하는 이 짧은 전이 속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를 꿈처럼 교차하는 황혼은
(신부님, 저를 축복하소서) 내 비록 이를 바라노라 바라지 않더라도
바위 해안을 향해 난 넓은 창으로부터
하얀 돛배들은 여전히 바다를 향해 비상하느니, 바다를 향한 비상
부러지지 않은 날개들

(“재의 수요일” VI, 부분)

재의 수요일 (II) – T. S. 엘리엇

March 1st, 2011

재의 수요일 – T. S. 엘리엇

Ash Wednesday (1930) by T. S. Eliot (1888~1965)

I / II / III / IV / V / VI

II

여인이여, 세 마리 흰 표범이 로뎀나무 아래 앉았으니
저문 날의 서늘함 속에서, 물릴 만큼 먹은 뒤
내 다리와 내 심장과 내 간과 그것이 담겨 있는
텅 빈 내 해골 속에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이 뼈들이
살겠느냐? 그리고 그것이 담겨 있는
뼈들이 (이미 말라버린) 철그덕거리느니;
이 여인의 선하심 때문에
그리고 그 여인의 사랑 때문에, 그리고
깊은 생각 속에서 여인은 자신의 동정을 바라기에
우리는 밝게 빛난다. 그리고 여기서 해체된 나는
내 행동을 망각에 내어주고, 내 사랑을
광야의 후세에게 주어 큰 열매를 맺게 하느니.
바로 이것이 되살리는 것은
내 창자와 내 눈의 시선들, 그리고 소화할 수 없어
흰 표범이 토해낸 것들. 여인은 물러서서
흰옷을 입고 깊은 생각에 잠기니, 흰 옷을 입고
흰 뼈들이 망각을 속죄하게 하라
그 안에는 생명이 없나니. 내가 잊히듯이
그리고 잊히리니, 그리하여 나는 잊고
뜻에 헌신하고 집중하느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예언이 바람에 내리니, 바람에 내리리니, 오직
바람만이 들을 것이기에. 그리하여 뼈들이 철그덕거리며 노래하였으니
메뚜기의 무게마저 짐이 되는 허약함으로 말했으니,

침묵의 여인,
고요와 고뇌로
찢긴 그 전체
기억의 장미
망각의 장미
지쳐버린, 그러나 생명을 주는
염려하도록 평온한
단 하나의 장미는
이제 동산이니
거기서 모든 사랑이 끝나고
채워지지 못한 사랑의 고뇌
채워진 사랑의 더 큰
고뇌가 끝나느니
끝이 없는 것들의 끝
목적지 없는 여행
다다를 수 없는
모든 결말
말 없는 말씀과
말씀 없는 말
어머니께 감사드리니
그 동산에서
모든 사랑이 끝나기 때문

로뎀 나무 아래서 그 뼈들이 노래했으니, 흩어지고 빛나는
우리는 흩어져서 기쁘다, 우리가 서로에게 선한 일을 하지 못했으니,
저문 날의 서늘함 속에서, 모래의 축복과 함께,
자신과 서로를 잊어버리고, 하나가 되느니
들판의 고요 속에서. 여기가 그 땅이니 당신께서
제비뽑아 나누실 곳. 분열도 일치도 중요하지 않으리
이곳이 그 땅. 우리의 유산.

(번역: 주낙현 신부)

재의 수요일 (III) – T. S. 엘리엇

March 1st, 2011

재의 수요일 – T. S. 엘리엇

Ash Wednesday (1930) by T. S. Eliot (1888~1965)

I / II / III / IV / V / VI

III

두번째 계단의 첫 굽이에서
나는 돌아서 아래를 보나니
같은 모습이 난간 위로 꼬여
고약한 냄새를 피우며 오르는 공기 속에서
희망과 절망의 거짓된 얼굴을 한
계단의 악마와 싸우고 있었느니.

두번째 계단의 둘째 굽이에서
나는 그들을 떠나 몸을 돌려 아래를 보나니
더는 얼굴이 없고 그 계단은 어두웠느니,
축축하고, 비틀거리며, 어느 늙은이의 허튼소리 같이, 가망 없는
혹은 늙은 상어의 이빨난 목구멍처럼.

세번째 계단의 첫째 굽이에서
무화과처럼 길고 볼록하게 홈파인 창이 있었으니
산사나무 꽃몽울과 초원의 광경 너머로
등 넓은 이가 청록색의 옷을 입고
오래 묵은 피리를 불며 오월의 계절을 매혹하였느니.
날리는 머리칼은 달콤하니, 그 입김 너머 갈색 머리칼
라일락과 갈색 머리;
흐트러진 마음, 피리의 가락, 세번째 계단 위로 마음은 멈추다 오르다를 거듭하고
시들고 시들 뿐; 희망과 절망 너머 힘을 내어
세번째 계단을 오르나니.

주님, 저는 부질없는 몸이니
주님, 저는 부질없는 몸이니

한 말씀만 하소서.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