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성찬기도”

Monday, March 21st, 2011

힘없는 이들, 억압받는 이들, 별난 이들을 위한 성찬기도

Eucharistic Prayer for the Powerless, the Oppressed, the Unusual

매릴린 맥코드 애덤스 (영국 성공회 사제, 신학자)

(대화)

+ 우리 하느님께서 여기 계시니
# 하느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 그대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마음을 엽니다.
+ 우리의 벗이요 우리의 사랑인 하느님을 만나러 여기에 모였으니
#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좋은 일입니다.
+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는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좋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벗 된 이들과 하느님을 먹였던 이들과 하느님과 논쟁했던 이들과 하느님을 어루만진 이들과 하느님에게 화난 이들과 하느님의 얼굴을 본 이들과 오직 자기 방식대로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느님을 떠났던 이들과 더불어, 우리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다함께)

거룩하시고 거룩하시며, 연약하신 하느님
사랑과 기쁨의 하느님
하늘과 땅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니,
우리와 늘 함께 하소서
우리 하느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집전자)

힘없는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과 별난 이들을 위한 하느님,
주님의 특별하신 사랑에 우리가 찬미하나이다.

주님의 성령꼐서는 깊은 곳을 뒤엎으시는 바람을 내시고
주님의 말씀은 혼동을 창조 세계로 만드셨으니,
주님께서 이를 보시고 ‘참 좋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주님 백성으로 만드시고 하느님 백성이라는 이름을 주시어
이름 없는 이들을 특별한 이들로 삼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광야와 같은 곳에서도 살 수 있도록 가르치셨으며,
누구도 알지 못했던 만나로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바위를 깨뜨려 물을 내시어 우리의 목마름을 축이시고
놀랍게도 주님의 지극한 신뢰를 우리에게 거듭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땅으로 우리를 이끄시어
그 공간 속에서 모든 이들이 함께 성장하고 펼쳐서 창조하고 사랑하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아버지 같은 이끄심과 어머니 같은 가르침을
포로가 된 이들과 낯선 이들이 받아들이도록 하시어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병든 이들과 노인들을 찾게 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주님 사랑의 표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사실을 잊고
다른 나라들처럼 모진 마음을 품고
우리 자신의 편의만을 위하여 세계를 조직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 위에 군림했으며
부족한 사람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더러운 이들이라며 배척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은 배신자로 배척당했습니다.
포로가 되고 고생할 때는 잠시 깨달았으나
우리는 늘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반역은 주님의 꿈을 이길 수 없었으니
주님께서는 배척당한 자로, 불법체류자로, 쫓겨난 자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와 피 흘리는 여인을 어루만지셨으며,
세리들과 어울려 먹고, 창녀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고통당하는 이들을 고치시고, 절망에 싸인 이들을 가르치셨으며
불안하도록 부족한 이들을 제자로 선택하셨고.
동서남북의 모든 이들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 전날 밤,
주님께서는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주님의 벗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 드십시오. 이는 그대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입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실천하십시오.
식사 후에, 주님께서는 잔을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 모두는 이를 받아 드십시오. 이는 새로운 언약의 내 피이니,
그대들과 모든 이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흘리는 것입니다.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실천하십시오.

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 속에서,
주님의 벗인 우리를 위한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의 담대한 새 삶인 주님의 부활을 소리 높여 외치니,
고우신 예수님, 오시어 우리 얼굴을 마주하며 껴안아 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계에서 난 선물인 이 빵과 포도주로 식탁을 마련하니
이것은 모두 우리와 살다가 에이즈로 죽어간 우리 형제자매이며,
우리가 만들어낸 실망과 실패이며,
우리가 고통받은 상처들이며, 우리가 만들어낸 슬픔입니다.
주님의 성령으로 이것들이 우리를 위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이며,
주님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세계 안에 있는 주님의 몸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거룩한 가족을 기억하시며, 특별히 이 교회를 기억하소서.
영사기가 멈춘 이곳을 주님을 향한 찬미로 채운 그 설립자들입니다.
용감한 필리핀 사람들,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이 새로운 땅을 시작했으며,
게이와 레즈비언이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으며,
교회에서 상처받고 쫓겨난 별난 이들이
주님의 입맞춤이 주는 힘과 주님 사랑의 힘을 찾았습니다.

우리를 과거와 미래의 모든 성인과 연대하게 하시고
우리를 내보내시어
다른 사람들을 도와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의 교회와 도시와 이 지구를 변화시키시어
주님의 사랑처럼 넓고 깊은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아멘.

Marilyn McCord Adams, “Eucharistic Prayer for the Powerless, the Oppressed, the Unusual” [Eucharistic prayer] —Equal Rites: Lesbian and Gay Worship, Ceremonies, and Celebrations, ed. Kittredge Cherry and Zalmon Sherwoo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5), 111–113.

(번역: 주낙현 신부)

성찬례의 신비, 바로 그대들이니

Saturday, February 19th, 2011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기억하며, 이 사건을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고 서로 변화하는 예배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의 행동 양식은 성찬례이다. 그 안에서 무엇이 변화되고 무엇이 봉헌되는가? 예배 공동체로 모인 교회 그 자신이 변화되고 봉헌된다. 그대들이 영하는 것은, 축성된 바로 그대들이니. cf. 성찬례와 교회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을 이해하고 싶다면, 사도 바울로가 신앙인들에게 하신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1고린 12:27, 로마 12:5). 그대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식탁에 높인 그 신비는 바로 그대들 자신입니다. 그대들이 받아먹는 그 신비는 바로 그대들 자신입니다. 영성체 때, 사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고, 그대들은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대들이 ‘아멘’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 그것은 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일부가 되십시오. 그때에 그대들의 ‘아멘’은 이루어집니다.

이곳에 그대들이 따로 가져올 것은 없습니다. 사도께서 성사에 대해 하신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빵은 하나이며, 우리가 비록 여럿이지만, 모두 한몸입니다'(1고린 10:17). 이를 깨달아 기뻐하십시오. 일치와 진리와 성실과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 덩어리의 빵.’ 이 한 덩어리의 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럿이지만 모두 한몸입니다.’ 되새기십시오. 빵은 곡식 하나로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여러 재료로 만들어야 합니다. 구마 예식을 통해서 그대들은 밀처럼 가루가 됩니다. 세례를 받을 때, 그대들은 부풀어 오릅니다. 성령의 불을 받아서, 그대들은 구워집니다. 그대들이 보는 것, 그 자체가 되십시오. 바로 그대들을 영하십시오.

St. Augustine of Hippo, Sermon 272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30주기

Wednesday, March 24th, 2010

한국 시각으로는 어제, 미국 시각으로는 오늘 3월 24일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축일이다. 1980년 오늘 아침 수녀님들과 성찬례를 드리다가 군부의 총에 암살당했으니, 꼭 30년이 되는 해이다. 작년에 적은 상념과 번역하여 옮겨 놓은 시를 살폈는데, 여러 생각이 다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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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순교 직후 사진은 그 죽음의 모든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며 격렬하게 드러낸다. 제대. 그 뒤로 참혹한 고통 속에 있는 예수의 십자고상. 제대 옆으로 쓰러져 있는 로메로 대주교의 몸. 주위에서 울부짖는 이들. 그 장면은 2천 년 전 성찬례 사건, 그리고 십자가 사건과 포개진다.

1.
사진 위로 기도와 상념을 가다듬었다. 그의 삶이 어떻게 기억될까 생각했다. 오늘 세계 곳곳의 교회에서는 지난 세기에 우뚝 선 이 순교자를 교단 전통을 넘어서 함께 기념한다. 당연히 미국 천주교의 여러 교구와 성당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미사를 드린다. 영국에서는 천주교와 성공회의 대주교들이 함께 기념 예배를 갖는다고 한다. 한국의 천주교와 성공회에서는 이날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천주교의 공식 전례력에는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기념이 없다.

천주교 바티칸에서는 그의 시성 제안을 받아들여 1997년 이후 그의 시성을 검토하기 시작했었다. 이듬해,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에게 “하느님의 종” 칭호를 부여했다. 수년 후 사람들은 그의 시성 진행이 늦어지는 것에 항의했고, 바티칸 당국은 얼마지 않아 그를 “복자”로 선포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몇 주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했고, 그 뒤로 이 일은 모두 묻혔다. 어떤 이들은, 남미 ‘해방신학’에 대한 경고성 훈령을 낸 장본인인 당시 신앙교리성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토 16세) 탓이라 의심하기도 한다.

미국 성공회와 영국 성공회는 로메로 대주교가 암살당한 3월 24일을 축일로 전례력에 지정하여 기념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죽은 날을 하늘나라의 생일날로 친다. 영국 성공회 런던 웨스트민스터 애비 성당에는 20세기의 순교자 입상이 세워졌다. 우리가 익히 아는 본회퍼, 마틴 루터 킹, 그리고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이다.

겹치는 몇 가지 사실들을 ‘트윗’하고 적어 놓았으나, 어젯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다 건너로 여러 일을 물어오는 이들과 잠시 대화하는 통에 시간을 놓쳤고, 이어진 통화 때문에 더욱 늦어졌다. 밤낮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대화는 어제와 오늘에 겹친 24일의 의미를 다르게 확장시켰다. 교회는 무엇이고, 성직(주교직과 사제직)은 무엇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2.
아침, 책상에 나와 앉으니 세계 성공회 소식(ACNS) 하나가 배달된다. 엘살바도르 성공회 바라호나 주교가 총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운전사가 총에 맞아 병원으로 옮겨졌고, 주교님은 다행히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주교님과 교회는 여전히 갖가지 폭력이 난무하는 엘살바도르 사회에서 예언자적인 사목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30년 전과 후가 겹쳤다.

오스카 로메로의 순교 (1980년 3월 24일), 그리고 엘살바도르 성공회 주교의 총격 피습(2010년 3월 17일)은 주교와 순교자에 대한 생각으로 옮아간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첫 몇 세기 동안, 주교는 대체로 ‘순교자’와 동의어였다. 이때 순교(martyria: 증언)는 선교의 다른 말이었다. 물론 주교는 지역 교회의 총괄 사목자요, 신학 선생이기도 했다. 이것이 위계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 몇 세기 후, 주교는 교리 수호와 교회 일치라는 명목 아래 세속 권력과 손잡고 ‘권력자’가 되었다. 순교자에서 권력자로 자리가 바뀐 것이다. 이러한 위치 변화는 이후 교회 역사에 큰 어둠을 남겼다. 따라서 위계의 목적도 바뀌었다. 그 어둠을 깨는 빛나는 주교들 몇이 있었으나, 어둠은 오래갔다. 한편, 현대의 주교 행태는 이제 CEO를 닮으려 한다. 이 마당에서는 순교(삶의 증언), 사목(보살핌), 선교(하느님 나라), 신학(기도와 성찰), 심지어 교회 일치를 위한 권위(전례와 교리)는 희미해진다. 볼썽사나운 거들먹거림과 범접할 수 없는 안정된 위치, 그리고 결제 권한이 자리 잡았다.

주교직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와 그에 대한 보살핌)에 ‘종속’된 것이다. 그 종속에 충실하여 공동체를 보살피며 지킬 때, 권위가 나온다는 점에서 주교직은 하나의 역설이다. ‘주님의 종’ 혹은 ‘하느님의 종’은 이 역설을 일컫기 위한 것이다. 이 역설의 신비를 살지 않기에 위계는 타락하여 지배 권력의 관리 체계가 된다. 이런 점들은 주교직의 대리(vicar)로서 사제(presbyter/priest)직에도 적용된다. 그러니 그 주교 아래서 그 사제가 나오는 법이다. 이런 점으로 교회 현실과 나를 돌아보며, 내 가슴을 친다.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3.
다시 우리는 어떻게 이 시대의 순교자를 어떻게 응시할 것인가? 십수 년 전 관람했던 영화 [로메로]를 생각하다가, 소개받은 유투브 동영상을 숨죽여 바라본다. 로메로 대주교는 당시 해방신학자 혹은 급진적인 신학자를 무마하려고 교황청이 임명한 내성적이고 보수적인 주교였다. 그러나 동료인 루틸료 그란데 신부의 삶이 주는 도전과 더불어 그의 피살을 경험하고, 그는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무엇보다 그는 권력(자들)이 마련한 어떤 공식적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걸었다. (이 대목에서 최근 어떤 일이 떠오르나, 남 부끄러워 차마 입에 담지 못한다.)

로메로와 그의 민중을 비추는 이 영상은 당대의 지구 반대편 작은 나라와 겹친다. 대주교 피살 후, 한 달 여 만에 그 지구 반대편에서 똑같은 살육이 저질러진 것이다. 그 영상은, 십자가 사건이 그의 피살과 포개지듯, 30년 전의 광주와 그대로 포개진다.

이를 지켜보고 한 세대를 넘게 살아오는 우리는 오늘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로메로 대주교는 간명하게 답했다.

오늘 우리에게는 비판적이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주어진 상황의 내부를 깊이 분석하지 않고 그 상황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허망한 일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는 군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열매 맺는 무화과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의에 ‘예’라 대답하고, 불의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만이 생명의 값진 선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