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금요일 – 창조세계를 품은 구원

Friday, April 25th, 2014

부활 금요일

사도 4:1~12 / 시편 118:1~4, 22~26 / 요한 21:1~14

2014년 4월 25일,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금요일 정오 성찬례

존 케이터 신부 The Rev. John Kater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여러분과 만나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어 제게는 큰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아울러, 한국 성공회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큰 비극, 너무도 슬픈 상실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의 슬픔을 나눕니다. 저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이 함께 슬퍼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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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블레이크, “아담을 창조하는 엘로힘” 1795/c. 1805)

“예수는 집 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4:11~12)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 베드로가 한 설교 가운데 나온 이 말들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기쁜 소식일 수도 있고 나쁜 소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 판단을 내리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이 무슨 뜻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과 그 벗들에게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 훨씬 큰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통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평화와 기쁨의 상태, 조화와 즐거움의 상태입니다. 성서는 이를 두고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되뇝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이 역사의 끝에서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바뀌고, 하느님께서 늘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통치는 우리가 평화와 기쁨을 알고, 그 통치의 표지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엿볼 수 있습니다. 이 희망과 전망이야말로 분명히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나쁜 소식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이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구원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면, 많은 사람에게는 나쁜 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해석은 유대인들에게 나쁜 소식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하느님께서 자기 조상들과 맺은 계약으로 영원히 마련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말은 평화롭고 겸허하고 자비심이 가득하고 너그러운 마음과 실천으로 살아가는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나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도 나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약속을 나름의 방식대로 이해한 문화와 전통에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베드로가 누구에게도 이런 나쁜 소식을 전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언제나 좋은 소식,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고 저는 베드로가 옳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모든 창조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사시러 오신 하느님께서는 세계 전체를 당신 품으로 끌어당기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바로 그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셨습니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와 연대하셨습니다. 인간성 전체를 껴안으시고 인류 안에서 하느님의 깊은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여러분과 저만 변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신 대로 그분을 아는 사람들만도 아니고, 그분의 십자성호를 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사건은 우리 인간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만이 아니라 이 창조 세계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이 창조세계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것은 전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은 변화시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을 당신 가까이 끌어당기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잘 모르는 모든 사람도 당신께로 끌어당기셨습니다. 하느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 당신께로 끌어 당겨 품으시며 거기에 계십니다.

여러분은 잘 기억하시지요? 마지막 날에 예수님을 옷 입히고, 잡술 것을 드리고, 방문하고, 위로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제가 언제 그런 일을 했나요?”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여러분 형제자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만이 행복하고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을 부른다고 행복하고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옳고 완전하다는 이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겸손하고,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분명 베드로는 옳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복된 소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복된 소식입니다.

마지막 날, 누가 하늘나라에 들고, 누가 빠질지를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심판은 우리가 내릴 일이 아닙니다. 심판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제한이 없고 경계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아멘.

(번역: 주낙현 신부)

케네스 리치 “하느님 체험” – 새로운 영성 선언

Thursday, February 16th, 2012

‘성공회에는 조직신학이 없다’는 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용감하게 내뱉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 근거도 없이 얕은 생각으로 떠든 말을 주워듣고 되뇌다 퍼진 말일 테다. 조직신학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련한 여러 사안을 성서와 전통과 인간의 하느님 경험에 기대어,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풀어보려는 노력이다. 좀 더 보편적 소통의 틀과 훈련으로써 조직신학이라는 하나의 신학 방법이 존재한다. 이런 노력과 방법이 없는 교회와 신학이 있겠는가?

다만, 성공회는 특정한 교리적 주장이나, 몇몇 신학적 거장의 주장에만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경험의 지평을 넓고 다양하게 본 탓에, 좁은 의미에서 ‘특정 교리 체계에 갇힌 서술로서 조직신학 혹은 교의학’과는 거리를 둔다. 신앙적 사안들에 대한 오랜 논의에서 배우고 숙고하며 대화하되, 이를 역사의 전통과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다. 이것이 성공회가 조직신학을 하는 방법이다. 오히려 이런 고민 탓에 요즘은 조직신학이라는 말보다 ‘구성(constructive) 신학’이라는 말을 쓰자는 이들도 있다.

무책임한 말에 부화뇌동하여 신앙 전통에 흐르는 면면한 근거와 삶에는 애써 눈감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변명하려 하지 않는지 살필 일이다.

이 참에 몇 달 전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 떠올라 정리하고, 그 뒤에 동료와 나눈 번역 하나를 덧붙인다.

케네스 리치 신부의 <<하느님 체험>>(Epxeriencing God, 1985)이라는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우리말 제목 <<하나님 체험>> 청림출판, 2011). 이 책은 웬만한 조직신학과 영성신학 입문서보다 훨씬 낫다. 갖추어 신학사전으로 쓸 만큼 내용과 색인이 풍요롭고, 영적 독서집으로 쓸 만큼 엄선된 인용이 빼곡하다.

서방 교회 전통의 편향을 넘어서서, 교부 전통과 정교회 신학의 목소리를 회복하여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에서 전통이 풍요로움이 되살아난다. 당연히 교부들 및 정교회 전통의 사고방식, 즉 그 영성과 신학, 전례와 실천에 대한 입문서 역할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오랜 현장 사목 경험 탓에 그가 풀이하는 교회의 영성 전통은 늘 일상과 현장 바닥에 닿는다.

성공회-가톨릭(Anglo-Catholic) 전통, 특히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 전통에 깊이 자리 잡은 저자이기에, 성공회 신학과 전통에 대한 해방신학적 근거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성공회 독자라면, 8장 “육신 속의 하느님”, 9장 “성찬례의 하느님”에서 큰 도전과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케네스 리치 신부는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모든 참된 신학은 변화에 관한 것이다. 참된 하느님과 만남 안에서, 그 만남을 통해서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한 것이다”(서문).

친절하게도 리치 신부는 책 끝에 이 책 전체를 요약하는 후기를 마련하여, 이 책에 담긴 새로운 영성 회복의 방향을 선언한다. 이 훌륭한 ‘매니페스토’를 아래에 옮긴다.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과 별개다.)

후기: 쇄신된 영성을 향한 선언

1. 쇄신된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느님의 비전을 현대 세계에 회복하는 일에 관심한다. 이 영성은 현재의 상황에 의미있는 방법들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영의 깊은 차원에 대해서 말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겸손하고 신중하게 마르크스주의와 심층 심리학, 풍요로운 자각을 향한 사회적 탐구에서 얻은 통찰을 고려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2. 이 영성은 유대 백성의 삶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에 근거한다. 구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광야에서 순례하는 백성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서 말하며,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그 거룩함과 정의를 추구한다.

3. 이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두며,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시는 하느님의 충만함을 본다. 이 영성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느님과, 동지인 인간, 즉 드러난 신성과 들어 올려진 인성을 함께 본다.

4. 이 영성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도적 교회의 신앙을 바라본다. 그것은 인류에게 일치를 주시는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화해를 이루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요, 빛과 사랑의 하느님,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하느님, 그리스도의 몸을 양육하고 세우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다.

5. 이 영성은 사막의 영성이다. 사막의 경험을 통하여 교회의 관상적 삶을 그리워하며 이를 굳건히 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성 생활에 똑같이 중요한 홀로됨과 함께함을 같이 추구한다.

6. 이 영성은 구름과 어둠의 영성이다. 하느님의 마음에 있는 신비와,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 속에 있는 신비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손쉬운 답변만 내놓는 종교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신앙의 어둔 밤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관상적인 영성이다.

7. 이 영성은 물과 불의 영성이다. 즉 씻어내는 영성, 정화하는 영성, 쇄신하는 영성, 영적인 따스함의 영성이다. 세례의 물과, 성령의 불이라는 상징 속에서, 이 영성은 지속적인 거듭남과 삼키는 불이신 하느님에게서 매일같이 도전받으라는 부르심을 본다. 이는 카리스마적인 영성이다.

8. 이 영성은 육신이 된 말씀에 근거한 영성이다. 이 영성은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붙잡고, 하느님 자녀의 살과 피 속에 있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섬기려고 노력한다. 하느님의 선물인 물질과 인간의 성을 즐거워하고, 인간적인 것 안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관문을 본다. 이는 유물론적 영성이다.

9. 이 영성은 성찬례의 영성이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인 성찬례 거행이 있다. 이 영성은 성찬례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본질을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이 영성은 세상 속에서 나눔과 평등의 성찬례적 삶을 선언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이는 공동 생활의 영성이요, 거룩한 나눔의 영성이다.

10. 이 영성은 고통의 영성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서 복음의 핵심을 찾기 때문이다. 이 영성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선포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 한다.

11. 이 영성은 신비주의 저자들에게 배우면서 하느님이 모든 실재와 우리 존재의 근거임을 본다. 이 영성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그리스도교 신학의 필수 요소로 회복하고 증진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적 지도와 내적 생활을 심화하는 사목을 발견하여 증진하며, 신앙생활의 신비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함께 묶으려고 노력한다.

12. 이 영성은 여성의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 성서와 전통 속에서 하느님에게 여성의 이름을 붙였던 일, 그동안 잊혀지고 무시당했던 여성적 방식으로 하느님을 경험하고 묘사한 저자들의 통찰 등을 진지하게 다룬다. 이 영성은 현대 여성 운동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13. 이 영성은 정의와 평화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며, 인종 차별을 비롯한 여러 지배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세계평화와 핵무장 해제 군축을 도모하는 운동 속에서, 가난과 불평등을 없애는 캠페인 속에서 하느님을 알고자 하고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 좀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드려는 투쟁 속에서, 이 쇄신된 영성은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보며,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나눈다.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1985, 421f.

후원: 구균하 신부, 민김종훈 부제

선교를 향한 리더십과 영성

Wednesday, June 15th, 2011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선교 Missio Dei 에 참여하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이 부름에 응답하여 참여하고 실천하는 행동을 ‘선교'(mission)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mission)은 선교이다. 교회의 여러 구조와 실천은, 그 위계질서를 포함하여, 이 선교 사명을 위한 일에 종속된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전망 속에 신자의 삶, 사목자의 삶, 교회의 삶이 있다. 교회의 삶과 실천은 하느님 나라를 지향한다. 그러니 사목과 전례, 교육과 영성, 이런 실천도 모두 하느님의 선교 지평에서 자리 잡아야 한다. 교회의 위계질서, 특히 리더십은 더할 나위가 없다. 교회의 선교 지향과 실천에서 지도자와 그 리더십은 너무도 중요하다.

멀리 뉴질랜드에서 글 하나가 배달된다. 가만보니 2년 전에 회의차 갔다가 만났던 신부님의 글이다.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 제 3회(재속회) 회원이고 오랫동안 청소년과 청년 선교에 몸을 바친 분이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뉴질랜드에서도 고민이 많았다. 청소년-청년 선교가 쉽지 않다는 것. 교구나 교회 지도자들은 변화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함께 변화하려 하지 않으니, 답보를 거듭한다 했다.

그 탓일까? 그는 리더십에 대한 체크 리스트를 제공한다. 돌아볼 점이 많다. 발설하지 못할 여러 생각이 겹친다. 다만, 이를 통해서 우리도 우리 처지에 맞는 체크 리스트를 새롭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것으로 교회 내의 지도자인 나 자신, 신자들, 그리고 여러 형태의 지도자들에게도 돌아보고 갖추라고 요구했으면 한다.

2020년의 리더십 – 지도자상

  • 무엇보다 먼저, 작금의 현실 교회에 물들지 않은 좀 더 젊은 리더십
  • 선교에 집중하며, 특히 성공회 전통 안에서 선교에 대한 이해가 있는 리더십
  • 성공회 전통을 그저 보존하려고만 들지 않는 리더십
  • 하느님께서 성공회 전통 안에서/통해서 세상에 생명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다는 믿음이 있는 리더십
  • 깊은 기도에서 나온 리더십
  •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리더십
  • 변화를 추구하는 리더십
  • 모든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물든 리더십 – 하느님은 우리가 종종 사랑하기 어려운 이들마저도 사랑하신다.
  • 복음을 설교하기보다는 복음을 사는 데 관심을 둔 리더십
  • 당연히 여기지 않고, 물음을 던지는 리더십
  • 혼자서 감독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사랑하고 그들과 어울리는 리더십
  • 팀과 일하는 리더십
  • 사람들을 도와서 비전과 일이 가능하도록 돕는 리더십
  • 사람들이 처한 사목 영역에서 사람을 키우고 자료를 제공하는 리더십
  • 자기 또래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와 함께하려는 리더십
  • 선교는 모든 세대와 함께, 특히 젊은이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확신이 분명한 리더십

참고: 이 블로그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여기저기서 다뤘다. 성직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모든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영성적인 면에서 바라본 것들을 선별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