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던 – “죽음아, 뽐내지 마라”

March 29th, 2013

죽음의 성 금요일을 지나 침묵의 성 토요일로 옮아가는 시간, 성공회 사제요, 시인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존 던(John Donne)의 시를 읽는다.

“1613년, 성 금요일, 서쪽으로 말을 달리며” Good-Friday, 1613, Riding Westward

“죽음아, 뽐내지 마라” Death, Be Not Proud

그중 그나마 우리말로 옮기기 쉬운 “죽음아, 뽐내지 마라”를 번역하여 이곳에서 나눈다.

일찍이 사도 바울로 성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1고린 15:55)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죽임과 죽음의 세력에 대한 사망 선고이다. 신앙인은 이 역설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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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아, 뽐내지 마라

존 던

죽음아, 뽐내지 마라. 어떤 이들은 너를 일컬어
힘 있고 무섭다고 하지만, 너는 그렇지 못하니
네가 무너뜨렸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죽지 않았으니. 이 불쌍한 죽음아, 너는 나도 죽일 수 없느니.
안식과 잠을 볼지라도 그것은 너의 환영일 뿐이며,
거기에선 오히려 더 많은 기쁨이 흘러나오나니
가장 선한 사람이 너를 따라 먼저 갈지라도
그들의 몸과 뼈는 안식을 누리고, 그들의 영혼은 구원을 얻느니.
너는 운명과 우연과 왕들과 절망하는 이들의 노예이니
독약과 전쟁과 병마에 깃들인 것.
아편이나 마법으로도 우리를 잠들게 할 수 있으리니
너의 일격보다 더 나으니, 네가 뽐낼 까닭이 무엇인가?
그 짧은 잠은 지나가고,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리니
더는 죽음이 없으리, 죽음아, 그때에 네가 정녕 죽으리.

원시: John Donne, “Death, Be Not Proud”
번역: 주낙현 신부

성삼일에 듣는 “톰 조드의 유령”

March 28th, 2013

성삼일(Triduum Sacrum)에 듣는 고전적인 성가가 숱하겠으나, 나는 오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톰 조드의 유령”(The Ghost of Tom Joad)을 들으며, 이 거룩하고 전복적인 시간을 준비한다.

미국 현대 소설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널리 읽혔지만, 그 자신의 사회주의와 소설이 보여주었던 미국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소설에 담긴 참혹한 현실은 세계화한 자본주의의 패권 아래 곳곳에서 이주 노동자와 같이 여전히 주변부를 떠도는 이들 안에서 확장될 뿐 나아질 기미가 없다. 왜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까?

스타인벡은 노벨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인간의 증명된 능력을 선언하고 축하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능력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위대함을 위한, 패배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맹과 용기를 위한, 그리고 측은지심과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약함과 절망에 대항하는 끊임 없는 싸움에서 이것들은 희망과 저항의 연대를 위한 빛나는 깃발입니다. 인간이 완전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작가는 문학에 헌신하는 사람도 아니며 문학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성공회 신자(Episcopalian)였던 스타인벡은 역사 속의 교회에 비판적이면서도 복음의 가치인 측은지심과 사랑을 그의 소설에 되살려 놓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위에 인용한 그의 말에 절반은 동의한다. 측은지심과 사랑을 끝까지 밀고가야 한다는 그의 말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희망과 저항의 연대를 위한 근거여야 한다고 나 스스로 해석할 때 그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피력한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낙관주의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가 생각했던 이상이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펼쳐졌고 펼쳐지는지를 목격했던 후대 사람이니까. 세상이 변하지 않는 여러 까닭 가운데 하나는 그런 낙관주의가 인생 곳곳에 놓인 탐욕과 권력 앞에서 너무도 쉽게 무너진 탓이라 보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은 바로 이같은 낙관주의의 균열과 그 깨어진 틈에 존재한다. 신앙인은 본질적으로 허튼 낙관주의를 의심하는 비관주의자이며, 억압의 비관주의에 저항하는 낙관주의자이다. 이 균열과 깨진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부활이 그 빛이다.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1939)가 출간된 지 반세기가 넘은 마당에,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사람이 아닌 <<톰 조드의 유령>>(1995)을 우리 안에 되살려 놓는다. 이 노래를 성삼일 성가로 들으며 나는 톰 조드의 유령, 아니 예수의 유령을 찾는 성삼일을 시작한다.

톰 조드의 유령
브루스 스프링스틴

철길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느니
고속도로 순찰 헬기가 산등 위를 날아오고
다리 밑 모닥불 위에선 뜨거운 국물이 끓고 있네
피신처를 지나는 철조망의 끝은
새로운 세계의 질서로 온 것을 환영하고
남서부 어디 차 안에는 가족들이 잠을 자고
집도 없고, 일자리도 없고, 평화도 없고, 휴식도 없는 곳
고속도로는 이 밤에도 생기가 돌지만
누구도 서로 어디로 가느냐고 웃으며 묻지 않느니
나는 이곳 모닥불빛 아래 앉아서
톰 조드의 유령을 찾고 있느니

그는 침낭에서 기도서를 꺼내고
사제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니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때를 기다리고
지하도 아래 종이상자 안에서
약속된 땅을 향한 편도 차표를 꺼내느니
배에는 구멍이 들고, 손에는 총을 든 땅
돌베개를 베고 잠들며
도시를 흐르는 수로에서 몸을 씻는 땅

고속도로는 이 밤에도 생기가 돌고
모두가 어디로 향하는 지 알고 있지만
나는 모닥불빛 아래 앉아
톰 조드의 유령을 기다리느니

이제 톰이 말하네. “엄마, 경찰이 어떤 사람을 때리고 있을 곳에선 어디든
갓난아기가 배고파 우는 곳에선 어디든
피와 증오를 반대하는 싸움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저를 보세요, 엄마. 제가 거기 있을 거에요.
누군가 설 자리, 직장과 도움의 손길을 위해 싸움을 벌이는 곳에선 어디든
누군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곳에선 어디든
그들 눈에서, 엄마, 나를 만날 거에요.”

흠, 고속도로는 이 밤에도 생기가 돌지만
누구도 서로 어디로 가느냐고 웃으며 묻지 않느니
나는 이곳 모닥불빛 아래 앉아서
톰 조드의 유령을 찾고 있느니

(가사 번역: 주낙현 신부)

“안녕 – 분노를 내려놓기로”

February 8th, 2013

“안녕 – 분노를 내려놓기로”

영국 성공회의 사제이자 영국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인 가일즈 프레이저 신부의 말이다. 자신이 9년 동안 글을 기고하던 <처치 타임스>(Church Times) 지에 더는 글을 싣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마지막으로 쓴 글 제목이다. 이 글에 담긴 여러 말이 가슴에 꽂히는 바가 있어서 잠시 그와 해당 글 일부를 소개하고, 그리고 나 자신의 소회를 이에 비춰보기로 한다.

프레이저 신부는 영국 성공회 런던 교구 사제이자 니체 전공 학자로서 교회 및 사회 문제에 관한 진보적 발언을 계속했다. 특히 그가 소속된 ‘영국’ 성공회의 여러 정책에 대한 쓴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작년 ‘점령 운동'(Occupy Movement)이 런던 주교좌인 세인트 폴 대성당에 천막을 치고 있었을 때, 그는 그 대성당의 고위 성직자인 캐논(canon) 신부였다. 그는 점령 운동을 지지하며, 세인트 폴 대성당 측의 천막 철거 방침에 반발하여 캐논 신부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신자가 거의 없는 런던 시내 작은 교회의 주임 사제로 부임했고, 여전히 가디언지 등에 기고한다.

9년 동안 글을 써오던 <처치 타임스> 지면에 안녕을 고한 이유가 아프다. 새로 지명된 캔터베리 대주교 등 교회 당국자들의 정책에 비판과 분노를 내뱉는 일에 더는 시간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다. “더는 그에게 분노하거나, 내가 소속되어 있고, 앞으로도 나 자신이 그 한 부분일 교회에 대한 부끄러움에 시간을 쏟고 싶지 않다.” “[그동안 나는] 사적으로 불평하기보다는 공적으로 의견을 내어 비판하는 쪽을 택한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가일즈 신부는 새 캔터베리 대주교가 고수하고 있는 동성애 문제에 관한 태도에 실망한 듯하다. 실제로 저스틴 웰비 대주교는 얼마 전에 있었던 대주교 선출 확인 예식이 끝난 뒤, 언론 인터뷰에서 영국 의회를 통과한 “동성애자의 시민적 결합” 법안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었다.

프레이저 신부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영국 성공회는 지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방향에 영구적으로 반대하는 영적인 개척 분야가 있다… 반대보다는 찬성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성서의] 지혜를 따라, 더 찬성하면서 편안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찾기로 했다는 말이다…

“내 의견이 잘못된 적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조직의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을 점점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영속성만을 찾는 듯하다. 정말이지, 사탕 발린 말만 던지는 주교들에게 신물이 난다…

“점령 운동 건은 계속해서 나를 흠칫 놀라게 한다. 아마도 내가 죽는 날까지 남을 멍 자국이다. 새로운 사람이 세인트 폴에서 대주교가 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 상처가 다시 몰려왔다.

그와 똑같은 사안과 경험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의 감정과 결심을 이해할 만한 일들이 내게도 있었다. 거기서 헤어나지 못해서 지난 3년의 ‘시간을 허비’했다. 물론 내 책임도 크다. 그러면서 그동안 사랑과 마음을 두었던 기존의 조직에서 방향을 틀어 ‘영적으로 새로운 개척 분야’에서, 어둠을 직시하면서도 좀 더 밝은 일을 하려는 쪽으로 잠시 가닥을 잡기로 했다. 쉽지 않다. 또 다른 도전과 걸림돌이 많다. 그러나 우선은 이것이 나 자신을 추스르고 쇄신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이저 신부가 말한 ‘흠칫 놀라게 하는 사건과 멍’은 내게도 비슷하다. 외부의 비난과 치기는 실은 참을 만하다. 그것들을 허상으로 보면 되고, 실제로 허상이니까. 그러나 어떤 발언과 일에 대해 거의 철저하다시피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을 닫아 침묵하는 행태에서는 희망을 점점 잃었다. 나는 이제 그런 ‘도통한 이해나 단수 높은 침묵의 동의’를 믿지 않는다. 그것들이 설령 어느 차원에서 ‘도통’한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차원에서는 그만큼, 혹은 그보다도 더 나쁘게 자기 행동을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일로 상쇄하기 마련인 탓이다. 공감과 소통이 없는 조직에는 숨과 피가 돌지 않는다

프레이저 신부의 마지막 문장은 내 마음을 울린다.

“때로는 자신의 온전한 정신을 위해서는 분노를 내려놓아야 한다. 지금은 신선한 들판, 새로운 풀밭을 위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