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직 – 그늘에 핀 작은 꽃을 품는 일

Thursday, June 6th, 2013

아침 침묵 중에 슬며시 떠오른 회고를 옮긴다. 사제로서 지난 십수 년 동안 다양한 공동체와 정기적으로 미사를 드리며 성서와 복음의 말씀을 나누는 동안 주된 초점과 강조점이 조금씩 달랐고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해당 공동체의 상황이 다르니 당연한 일일 터이나, 나이에 따른 나 자신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 초점은 1)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 2) “용서, 사랑, 환대의 가치와 실천”, 3) “측은지심의 공동체”로 나뉜다. 그러나 같은 성서와 복음을 읽고 살피며 기도하는 처지인지라, 시기나 상황에 관계없이 이 초점들은 언제나 겹친다.

1.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 전통적인 수도공동체에 초대받아 함께 주일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며 나누던 복음 해석의 렌즈였다. 그 수도회가 갓 서품받은 사제를 불러 채플린으로 삼은 이유라고 믿었기에 젊은 혈기에 상당한 객기를 부렸고, 수도자들답게 늘 너그럽게 들어주셨다. 고정관념을 이겨내자고 말했지만, 수도자들의 너그러움과 공동체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배우는 시간이었다.

2. 용서/사랑/환대의 가치와 실천: 풍비박산이 난 공동체를 타국 타향에서 만나서 돌보는 일은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웠다. 공동체의 내력을 들춰보니 온갖 비난과 미움의 상처가 엿보였고, 사람이 떠난 텅 빈 쓸쓸함에 짓눌려 있었다. 이런 처지에 복음은, 우리 자신을 잘 돌보는 방법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다시 환대하는 일이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가진 것 없이 남은 쓸쓸한 이들의 겸손이 마련한 작은 공간에서 나는 마음껏 내 소리 내며 살기고 했고, 종내에 내력이 지닌 하릴없는 쓸쓸함에 나 자신이 짓눌리기도 했다.

3. 측은지심의 공동체: 복음을 들고 세상의 변화를 바라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복음이 특정한 형태의 정치-이념적 주장의 외피가 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20년 넘게 지켜봤고 성찰했고 시행착오도 겪었다. 거기서 얻은 배움은 신앙 공동체의 이상은 ‘측은지심의 공동체’이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복음에 깊이 흐르는 마음은 ‘측은지심’이다. 종교는 새로운 시선을 얻는 훈련이다. 이런 생각은 나이 드는 탓일까? 이런 공동체를 ‘리버럴’ 사이에서 마련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과 초점의 변화는 하느님의 이끄심이리라고 생각한다. 누구 말대로,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돌멩이처럼 여기까지 왔다. 다시 차여 어디로 굴러갈지 모른다. 그러나 내 의지로 하느님의 자유를 종종 거부하지 않았는지 돌아다 본다. 그 기도 공동체를 통해서 만났던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한다. 여러 얼굴과 표정이다. 고맙고 아쉽고 미안하다. 지금 스스로 위로와 힘을 얻는 말은 이것뿐.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고 감동을 줬는지,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얼마나 깊이 어루만졌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우리 행동이 어떻게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하느님 은총의 도구가 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언제 적었듯이, 그림자 짙은 그늘이 많은 내 삶. 다만, 그 안에 수줍은 작은 꽃들이나마 품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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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링펠로우 – 직업의 소명, 사제직의 소명?

Saturday, May 11th, 2013

요즘 스트링펠로우를 더더욱 되씹는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나는 어떤 이들에게 ‘별난 놈’이라 불리기도 하겠다. 오해라고 항변할 필요가 없다. 항변하거나 해명하며 시간을 허비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스트링펠로우는 ‘직업이라는 소명, 그리고 사제직의 소명’에 대해서 반-문화적(counter-cultural)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복음의 가치 때문이다. 복음의 가치에 회심한 용기를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빠듯한 나이가 됐다.

아울러, 이달 말 서울에서 성직 서품을 받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분들과 나누고 싶은 말이기도 하여, 여기에 그의 말 한 부분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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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학생 시절에 어떤 특별한 이력과 출세를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출세하겠다는 생각, 그리고 세상의 전형적인 성공 기준이나 계산, 숭고한 척하는 목적, 도달하려는 목표에 대한 생각을 죽였다는 말이다… 도도한 척하며 이런 말을 하는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복음을 향한 내 회심의 한 면모일 뿐이다…

“이후에도 직업적 소명을 향한 야망을 거절하겠다는 내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런 나를 별난 놈이라 부를 사람도 있겠다. 법 공부를 시작할 때, 법률가가 된다는 일에 대해서 낭만적 환상이 내게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 내게 소명을 주시고 어떤 특별한 지침을 주셨기에 이런 일을 하겠노라는 식의 자의식에 멋대로 빠지지도 않았다. 변호사이든, 다른 어떤 직업이든 이런 환상에 나를 내어주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 소명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단순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지금처럼 나는 하느님 말씀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되라는 부르심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진정한 인간이 되라는 단순한 소명의 지평 안에서라야, 그 어떤 직업이나 일은 소명을 담아 전달하는 성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전문 직업이나 훈련, 학위 등은 그 자체로 절대로 소명이 아니다.”

“내가 사제가 되었더라면,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저주였을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는 사제가 되지 않겠다고. 더 나아가, 내 생애를 바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좀 더 투철할 때라야 사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논박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제도적 사제보다도, 아니 만인사제보다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더 중요하다.”

cf. 스트링펠로우 관련 글 모음: http://goo.gl/MstqW

성공회 역사와 전통은 왜 교회의 미래에 중요한가?

Monday, April 22nd, 2013

영국에 가 계신 최스테파노 수사님(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차가 아주 고약해서 줄곧 실패하다가 오늘에야 연락이 닿았다. 어떤 글을 읽자니 지난 몇 해 동안 나와 나눈 대화가 송곳처럼 되살아나더라는 말이었다. 신학교 성직 양성 과정과 성공회 신학과 역사에 관한 교육 문제였다. 내친김에 글을 번역해서 나누자고 했고, 그 초벌 번역을 검토하여 다시 싣기로 했다.

(실은 위 문단 아래에 긴 투정 어린 잡감을 적었는데, 편집 과정에서 다 날아가 버렸다. 그런 허튼 투정은 우리 현실을 비판하고 누구를 탓하는 모양이 돼서, 그들에게도, 내게도 덕이 될 일이 아니니, 염려 많은 블로깅 프로그램이 내 안전을 위해 적당히 알아서 날려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오래도록 나눈 대화와 생각을 지인들을 잘 알 것이다.)

성공회 역사와 전통은 왜 교회의 미래에 중요한가?

배리 오포드 신부 (옥스퍼드 대학교 푸지 하우스 신학교, 문서자료실 사제)

성공회 신학교 과정을 잘 아는 한 친구가 내 길을 가로막고 말했다. “문제는 성공회가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는 이들을 성직 후보자로 양성한다는 거에요.” 요즘 성직후보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성공회 역사와 영성은 물론, 그 역사 안의 중요한 인물들에 관한 이해 수준이 바닥이라는 말이었다.

그 친구 말이 맞는가? 만약 성공회 사제들이 성공회 역사와 영성 전통에 대해 무지하다면 정말로 심각한 문제이다. 1970년대 초반 내가 신학교에서 성직후보자로 훈련을 받을 때를 돌아봐도 우리 성공회 유산에 관한 일관된 교육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이제 고인이 된 위대한 교회사학자 헨리 채드윅(Henry Chadwick) 신부가 경고한 대로, 성공회는 지금 기억 상실증 환자가 될 위험에 놓여 있다. 그나마 이 말은 그 사람이 적어도 지금은 잃어버린 정보를 한때 가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성직자들이 잃어버릴 지식조차 없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성직후보자들은 어디서 우리의 과거와 토대에 대한 이해를 얻을 것인가? 성직후보자는 신학교에서 관례에 따라 신학 학위 과정을 위해 공부하지만, 그 과정에서 성공회 역사와 영성은 별로 인기가 없는 듯하다.

성공회 신학교는 성직후보자들을 우리 전통 속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소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인 접근과 더불어 체험적인 접근 방법을 써야 한다. 예를 들어, 성공회 기도서의 역사에 관한 강의는 성공회의 영성 전통을 만들어낸 형식과 언어, 특히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체험하는 일과 균형을 이뤄야 한다.

성공회 역사학자였던 존 무어만(John Mooman) 주교는 이렇게 썼다. “성공회는 천주교와 개신교와는 다른 위대한 영성 전통을 지녔다.” 성공회의 영성 전통을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 미래에 성공회 사제가 될 신학생들은 조오지 허버트(George Hebert), 존 던(John Donne), 헨리 본(Henry Vaughan) 정도는 잘 알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성공회의 위대한 신학자와 영성가에 관해서도 잘 아는가?

청교도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성공회의 본질을 확립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독특한 도덕신학과 수덕신학을 통해서 새로운 “실천 신학”을 마련했던 인물들을 떠올려 보라. 예를 들어, 리차드 후커(Ricard Hooker), 랜슬롯 앤드루스(Lancelot Andrews),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로버트 샌더슨(Robert Sanderson), 윌리암 비버리지(William Beveridge) 등을 떠올릴 수 있는가?

교회에 남은 골동품 연구를 옹호하는 말이 아니다. 성공회 기도서나 그보다 못한 킹제임스 성경을 숭배하자는 말도 아니다. 17세기 정신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금 우리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요구와 경험과 이해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신학자들이 말해줄 거리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들은 현재의 성공회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그들의 존재와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굳건한 반석 위에 서지 못한다.

걱정스럽다. ‘성공회’라는 말을 역사적 정당성이 없는 용어로 내동댕이치는 일을 볼 때도 그렇거니와, 어떤 사람들이 성공회에서 성직후보자가 된 이유가 성공회에 헌신해서가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성공회가 “고기를 잡는데 유리한 고깃배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자니, 걱정스럽다. 우리 역사와 전통에서 배우지 않으면, 우리의 목적도 금세 흐려지고, 물려받은 전통의 가치에 대한 확신도 흔들리게 된다.

미래의 성직자들이 성공회의 유산 위에 발을 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신학교의 사제 양성 과정을 심각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특별히 성직후보자들에게 필요한 자격 요건이 일반 대학생들과 대학원생들의 요건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를 분명히 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성공회 역사에 관한 무지가 교회 일치 대화에도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올바른 교회 일치 운동은 각 대화 당사자 교회의 전통이 마련한 공헌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전통을 모른다면 다른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줄 것은 없다.

교회사는 신학 공부에서 자주 무시당하거나 관련 없는 일로 취급된다. 성공회 역사는 성직자 양성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래서 성직자는 사회와 교육에서,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무시당하는 그리스도교와 성공회의 유산을 가르쳐야 한다.

성공회 영성신학자 알친(A.M. Allchin)은 이렇게 말했다. “성공회 신자는 지금 깨닫지 못하는 전통의 상속자이다. 정체성을 회복하려면 기억(역사)을 회복해야 한다.” 성공회의 독특한 신학 방법, 그리고 하느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방법을 이해해야 가능한 일이다.

지난 4세기 동안의 성공회 영성을 아우른 선집이 2001년에 출간되었다.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 등이 편집한 “Love’s Redeeming Work”(OUP)라는 책이다. 과연 성직후보자들 중 몇 명이나 이 책을 사서 읽으며 성공회의 위대한 유산을 익히라고 지도를 받았는지 궁금하다.

성공회 신자들은 우리 성공회의 질과 가치를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다. 지금은 성공회의 위대한 유산 속에 담긴 가치를 깨닫고 받아들여 자신감과 정체성을 회복할 때이다. 제3천년의 시대가 던지는 도전들에 잘 대응하려면 우리 자신이 쇄신된 성공회 신자가 돼야 한다. 이 쇄신은 성공회의 초석을 놓은 신학자들의 생각과 신심을 알 때라야 가능하다. 그들도 급변하는 시대를 살면서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실천에 관한 분명한 가르침을 찾는다. 이들이 우리 성공회에 귀 기울이게 하고 싶다면, 이미 검증된 “성공회 교부들의 신앙”에 뿌리를 두면서 우리 시대에 맞게 다시 빚어진 성공회 방식의 제자도를 당당하게 전해야 한다.

원글: The Rev. Dr. Barry Orford, “Why history is crucial to the Church’s future” in The Church Times, Feb 8, 2013
번역: 최스테파노 수사 / 수정: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