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성공회' Category

전통: 난쟁이와 거인의 관계

Friday, April 21st, 2006

아래 글에서 “전통”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전통은 늘 양면적이지만, 사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참 많다. 그것은 마치 정교회 어느 아이콘처럼, 천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일 수 있다.” 다시 봐도 참 밋밋한 표현이다.

사실 전통에 대한 내 태도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정확한 인용이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표현하고 말았다. 아마 십 수년 전 대학원 교회사 세미나에서 읽었을 어느 인용구였다. 종교개혁은 중세라는 거인에 무등탄 난쟁이라는 것이었는데, 오늘 그 기억을 되살려 그 말의 시작을 찾아보았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난쟁이와 같아서, 거인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 좀더 명확한 시선을 가져서도 아니요, 실체에 더 가까워서가 아니라, 거인의 키를 빌려 너 높이 올라 있기 때문이다.”

12세기 영국 출신으로 프랑스 샤르트르 주교가 되었던 솔즈베리의 존 (John of Salisbury)이 당대 철학자였던 베르나르의 말을 인용해서 전해준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성공회 정신을 대표하는 이들에게서 반복 이용되거나 변주되었다. 성공회 사제요 시인이었던 조오지 허버트,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튼, 그리고 근대 성공회 정신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문학비평가였던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가 그들이다.

조오지 허버트 George Herbert (1651):
“거인 어깨 위의 난쟁이는 그냥 난쟁이나 거인보다 멀리 본다.”

아이작 뉴튼 Isaac Newton (1676):
“내가 (그들보다) 좀더 멀리 볼 수 있는 까닭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 (1828):
“거인의 어깨에 올라탔을 때, 난쟁이는 거인보다 멀리 볼 수 있다.”

말맛이 그 처지에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전통에 대한 비판과 존중을 생생하게 잡아내는 장면이라고 본다. 실제로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예언자들과 복음사가들의 관계를 이런 거인과 난쟁이로 표현했다. 우리는 난쟁이일 뿐이다. 겸손과 감사로, 묵은 것 안에서 힘을 찾아 그것으로 새로운 것을 열어보라는 지혜이겠다.

신앙을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관계 속에서 식별하려는 성공회로서는 이런 태도에서 전통을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난쟁이 때문인지 생각의 꼬리는 갑자기 발터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의 난쟁이로 이어진다. 물론 이 난쟁이들은 전혀 입장이 바뀌어 있다. 벤야민의 난쟁이는 베르나르의 거인이고, 베르나르의 난쟁이는 벤야민의 장기두는 자동기계이다. 하지만 같은 점은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다.”

윌리암 템플 대주교, 교회의 존재 이유

Monday, April 3rd, 2006

지난 세기 최고의 그리스도교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었던 윌리암 템플 (William Temple, 1881-1944) 캔터베리 대주교는 교회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

교회는 자기 내부의 일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지상의 유일한 사회이다. (the Church is the only society that exists for the benefit of those who are not its members.)

교회가 커피숍보다 많은 한국의 처지에, 매 주일 미사 참석 인원 평균이 8천명에도 못미치는 성공회가 한국에 존재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템플 대주교의 교회에 대한 정의는 그 존재 이유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기 내부 사람만이 아닌 “타자들,” 특히 주변으로 내쫓긴 사람들을 끌어 안으려 노력해 왔던 까닭에 한국 성공회는 존재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이 노력과 이상이 꺽이지 않도록 스스로 채근질할 때다.

동성애와 성공회의 일치

Friday, March 31st, 2006

한국 성공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몇몇 세계성공회 소식을 접하고서 쓴 마음이 들어 긴 댓글을 달았다 (댓글이라야 소개된 기사에 대한 정정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그 댓글의 일부를 여기 밑에도 옮겨 놓는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관구 홈페이지를 제작해서 운영하던 바였고, 한동안 한국성공회 신문에 세계성공회 관련 기사를 제공했었기에, 다른 분들이 올리는 소식에 귀가 가는 것은 당연하다. 예감했던 대로 작금 세계성공회의 기사는 모두 동성애 관련된 세계성공회의 일치 문제이다.

벌써 지난 이야기지만, 현재 진행형이기도 한 이야기이므로 배경을 되살려 보자면 이렇다. 2003년 미국성공회 관구 의회는 동부의 작은 교구인 뉴햄프셔에서 주교로 선출된 진 로빈슨 신부의 주교 인준을 통과시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까닭은 그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공개한 주교 후보자였고,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었던 탓이었다. 공교롭게 그 자리에 방문객으로 참석한 차였고, 그 여파가 커서 연일 진행 과정을 취재하듯이 했고, 그 내용을 개인적인 성찰을 곁들어 서울 교구장 주교님께 긴 편지를 드리기도 했다.

물론 한국의 일반 언론이나 교계 언론에서도 이를 빠지지 않고 다루었다. 당시 기사로만 보면 특별히 문제 삼을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 여파는 한국성공회 관구 홈페이지를 온갖 저주와 욕설과 정죄로 물들게 했다. 정통적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욕지거리였다. 몇몇 중요하고 심도 있는 댓글들이 이어지긴 했지만, 성공회는 자체로 동성애 종교, 혹은 게이 종교로 낙인 찍히는 중이었다. 그 참에 이곳 학교에서 가르치시는 교수 신부님의 글을 번역해서 한국의 신부님들께 돌리기도 했고, 또 다른 신부님의 글과 자료로 이 문제를 신중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급박한 우리네 관심사가 아니었거나, 신부님들이 속으로만 깊이 삭이시느라 그랬는지 특별한 반응을 접한 적이 없었다.

한국 성공회 신문의 세계성공회 기사를 내내 쓰고 있던 차여서, 이와 관련한 소식을 몇 차례 올렸다. 그리고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람베스 특별 위원회를 조직해서 동성애와 관련된 논란 속에서 “세계성공회의 공동체의 일치”를 어떻게 지켜내며 강화할 것인지를 연구하게 했다. 그 결과 이른바 [윈저 보고서]가 나왔다. [윈저 보고서]에 대한 기사를 끝으로 세계성공회 기사 송고를 그만 두었다. [윈저 보고서]와 캔터베리 대주교의 말씀대로, 이것을 어떤 대화와 숙고의 시작으로 보아야 하겠기에 다른 기사를 제공하는 것이 자칫 빈 논란을 증폭시킬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은 닫아버린 질문과 답변란에서 몇차례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후 이와 관련된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대림절 사목 서신을 성공회 신문에 소개했다. 다행히 [윈저 보고서]는 우리 말로 번역되어 이미 우리 신부님들이 모두 읽으셨으리라 생각한다.

그 전후에 많은 일들이 계속 진행되었다. 세계성공회 관구장 회의를 비롯하여, 미국성공회 내의 분열 조짐과 몇몇 교회들의 성공회 탈퇴, 나이지리아 아키놀라 대주교의 미국성공회를 향한 맹렬한 비난, 성공회 내 보수파들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사우스”의 결성, 영국 의회의 동성애자의 시민적 결합 인정에 따른 영국 성공회의 미온적 반응, 그리고 이에 대한 나이지리아 대주교의 영국 성공회 비판과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관련을 나이지라 성공회 교회 헌장에서 삭제한 일 등… 그리고 가까이는 이러한 격렬한 논쟁 가운데 내가 머물고 있는 캘리포니아 교구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주교 선출 위원회는 7명의 주교 후보자를 발표했다. 그 가운데 3명이 동성애자여서 또 다른 동성애자 주교의 선출 가능성을 맞고 있다.

쉽지 않은 논란이요, 신학적, 신앙적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곳 신학교의 성직 후보자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동성애자이거나 동성애 관계에 살고 있고, 우리 가족도 신학교 아파트에서 이들과 이웃하며 살고 있다. 신학적 대화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과 신앙적 고민과, 또한 사목자로서의 비전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여전히 그러고 있다. 최소한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이들과 대화를 중지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삶과 더불어 식별하고자 한다. 그들의 깊은 신앙과 성실한 삶, 하느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소명과 헌신을 옆에서 목격하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정황과 대화의 진행, 그리고 삶의 경험들을 고려하는 가운데 이 문제들이 언급되었으면 좋겠다. 몇몇 선정적인 어투가 우리의 관심을 낚을 수도 있겠고, 해석 상의 아전인수가 우리를 명백해 보이는 결론으로 인도할 것 처럼 보이지만, 말 그대로 낚이거나 “의도된 오해”에 놀아나는 일이기 쉽다.

아래의 글은 한국 성공회 게시판에 이미 붙여놓았으나, 이전에 실었던 소식들과의 연관 속에서 이 사태를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런 상황 설명과 다시 싣는다. 최근 영국성공회 더럼 교구 톰 라이트 주교님의 신문 기고글과 역시 영국 엑스터 교구의 마이클 랭그리쉬 주교님이 미국성공회 주교회의에서 행한 연설에 대해서 한국 성공회 관구 홈페이지에 소개 기사가 나와서 몇 가지를 바로 잡으려고 붙인 댓글이다.

(more…)